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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5회 아볼로 캠프 전문분야별 연구결과]

* IVF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는 <지성운동> 꼭지를 통해 그동안 축적된 다양한 자료를 연재 형식으로 공유합니다. 원글에 포함된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나의 연구 주제, 한국 기독교의 자기계발(5)

이원석(중앙대 문화연구 박사수료)


5. 신자유주의와 한국교회

  자기계발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념과 달리 신자유주의는 이미 김영삼 정권 때부터 진행된 것이다. 하나 김대중 정권 앞에 놓인 국가적 차원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체제를 시장 주도형으로 재편하라는) IMF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야 했던 상황이 활활 타는 자기계발 사조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것은 사회 전체의 기틀이 변화된 것을 가리킨다. 개인적 측면에서 자기계발과 공동체 측면에서 상호 부조가 공존하던 양상이 사실상 해체되어버렸다. 개인과 가정으로 환원되고, 대부분의 부담이 개인과 가정으로 이양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안정망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상황을 감내하기 위해 자기계발 서적과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러한 지라 갑자기 자기계발이 온 국민의 교양으로 격상되었다. 그 전에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다단계나 세일즈, 그리고 기독교에 국한된 자기계발 독자층이 갑자기 전국민 단위로 확산된 것이다. 꿈팔이 열정팔이로 우리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자기계발계의 강사와 작가들이 온 국민의 멘토가 되고 아이들의 동화책도 자기계발서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입지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기독교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충직한 동반자이자, 자기계발의 조류를 주도하는 선도자이다. 단지 교회 내의 주도권 자체는 그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소위 강북형(선발) 대형교회에서 강남형(후발) 대형교회로 교계의 주도권과 더불어 자기계발의 패러다임이 이양되었다. 

  정정훈의 공간적 구분(강남-강북)이나 김진호의 시간대 구분(선발-후발)이나 본질은 동일하다. 대형 교회 안에 신자유주의의 정신이 흘러들어왔다는 뜻이다. 교회는 이제 기업이 되고, 목회자는 (영적 아버지에서) 경영자가 된 것이다. 효율성을 중심으로 만사를 판단하는 기업적 패러다임이 교회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교회성장학은 목회자의 기본 교양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기독 출판계의 자기계발 서적의 판매 추이를 새롭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 정부(1998-2003)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계의 베스트셀러 명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분야를 포함하여) 베스트셀러 순위에는 대중의 욕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종종 정확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지만, 욕망의 면에서는 상당히 정확하다). 


여기에서는 (교보문고 자료를 기준으로) 기독교 베스트셀러 순위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2002년: 1위는 <다니엘 학습법>, 2위는 <야베스의 기도>

2003년: 1위는 <다니엘 학습법>, 2위는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링컨>, 3위는 <목적이 이끄는 삶>, 4위가 <야베스의 기도>

2004년: 1위는 <목적이 이끄는 삶>, 2위는 <천국은 확실히 있다>, 3위는 <게으름>, 4위는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링컨>, 5위는 <갈대상자>

2005년: 1위는 <목적이 이끄는 삶>, 3위는 <갈대상자>, 4위는 <4차원의 영성>

2006년: 1위는 <긍정의 힘>, 3위는 <목적이 이끄는 삶>, 4위는 <긍정의 힘(실천편)>, 6위는 <록펠러: 십일조 비밀을 안 부자>

2007년: 2위는 <긍정의 힘>, 3위는 <목적이 이끄는 삶>, 4위는 <잘 되는 나>, 5위는 <자신감>(전병욱의 저작이다), 6위가 <긍정의 힘(실천편)>


  20세기 한국 교계의 기독교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노골적으로 자기계발적인 성향을 드러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 상위에 링크된 도서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에는 자기계발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교계 대중이 전에 비해 자연스럽고 또한 열정적으로 자기계발적 신앙서적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현대 미국 메가처치의 전범을 만든 새들백 교회의 담임 교역자인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신앙과 경영학의 만남을 보여준다. 신자와 교회조차 경영학적으로 해명되는 이면에는 피터 드러커가 있다. 피터 드러커가 미국 메가처치의 멘토라면, 밥 버포드는 메가처치의 산파이다. 피터 드러커는 밥 버포드를 통해서 미국의 대형교회 확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종합베스트셀러 순위에 2년 연속 2위에 오른 <시크릿>보다 2년 먼저 출간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신사고 운동의 계보를 잇는 신비적 자기계발 서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독교가 자기계발을 선도하는 모범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또한 김남준의 <게으름>은 윤리적 자기계발의 경건 버전이다. 청교도의 윤리학이 경건한 자기계발로 전유되고 있다.  

  경영학과 출신인 전병욱의 저작은 제목부터가 <자신감>,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등 신자유주의 특유의 도전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종교계의 스티브 잡스라고 해도 될 정도로 쇼맨십과 커뮤니케이션이 능란하다. 한때나마 청년 세대의 대표 멘토로 등극한 것은 우리 세대의 정념에 부합하게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시대에 딱 맞는 유형이다. 

  교육 문제는 자기계발의 핵심 영역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물론 교회에 있어서도 매한가지다. 개인의 간증으로는 김동환의 <다니엘 학습법>이, 학교의 이야기로는 김영애의 <갈대상자>가 특별히 주목을 끈다. 우리는 <다니엘 학습법> 등을 통해서 신앙과 교육과 자기계발이 하나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기꺼이 이를 사기 위해 우리 지갑을 여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순위 10위 안에 들어오진 않더라도 수없이 많은 주옥같은 기독교 자기계발서들이 한국 기독교의 영계를 재구성했다. 믿음을 표현하는 지금의 방식은 훨씬 더 세속적이고, 자아 과시적이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자아를 과시한다. 자기계발이 교회의 이데올로기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우리의 주체상도 새롭게 변해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 기독교에서의 자기계발 담론에 대한 연구는 자기계발을 통해 구현되는 새로운 주체상에 대한 규명이다. 이 주체는 무엇보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며, 확장시킨다. <시크릿>이나 <긍정의 힘>과 같은 신비적 자기계발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상상계에서의) 자아의 팽창은 외려 (상징계에서의) 주체의 예속을 강화할 따름이다. 

  <아Q정전>이 보여주듯이 정신 승리는 비루한 현실을 은폐하며 강화한다. 문제는 교회가 신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정신 승리를 수용하도록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 메가처치, 주류언론 등과 같은 지배집단의 치밀한 장기집권 계획과도 같은 거대한 음모론을 읽어내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 속에서 계급적 연대를 읽어낼 수 있을 따름이다.

  빗장 도시 혹은 빗장 동네(gated community)라는 용어가 잘 보여주다시피 계층 상승의 문이 닫혔다. 이건 현실적인 상황이고, 그러한 간격이 고착되는 것을 피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간격의 해소에 기독교가 개입하지 않고, 외려 조장한다는 사실에 있다. 교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자기계발적 주체로 만들고 있다. 


6. 나가며

  교회는 나의 고민이자 나의 사랑이다. 우리 주님과 한국 교회의 간격이 벌어지는 만큼 고민의 심도 또한 깊어지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 눈을 들어 한국 교회를 보면서 그렇게 말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세상의 타락한 문화를 선봉에서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게 과연 하나님의 성전인지 그리스도의 몸인지 모르겠다. 21세기의 루터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신자들로부터 세상의 멍에를 풀어주기는커녕 도리어 그 멍에를 더 세게 매고 있다. 그 수단은 신앙의 외피를 뒤집어쓴 자기계발이다. 자기계발, 즉 스스로 모든 짐을 껴안고 이를 감내하게 만드는 정신 조작의 현실에서 드러나듯이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바꾸고 있다. 이를 규명하는 것이 교회 변혁의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