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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5회 아볼로 캠프 전문분야별 연구결과]

* IVF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는 <지성운동> 꼭지를 통해 그동안 축적된 다양한 자료를 연재 형식으로 공유합니다. 원글에 포함된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나의 연구 주제, 한국 기독교의 자기계발(4)

이원석(중앙대 문화연구 박사수료)


4. 전후 한국 교회와 자기계발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 교회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전후 한국에서 자기계발이 도입되는 주요 경로는 기업과 다단계에 기독교를 더해야 한다. 이는 미국에 영향 받은 바가 클 것이다(이 세 가지가 하나로 만나는 좋은 사례가 ‘암웨이’다). 한국의 교회는 미국(의 교회)을 욕망하며, 나아가 미국(의 교회)의 욕망을 우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미국의 문화적 흐름을 가장 앞서서 도입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뜻이다. 자기계발 또한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한국 교회의 자기계발 도입은 대형교회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이는 먼저는 윤리적 자기계발을 수용하고, 다음으로 신비적 자기계발에 연결된다. 이후로 두 가지의 사조는 모두 한국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꿈과 희망을 제공한다(혹은 비전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믿음을 통한 것이다. 문제는 믿음의 내용과 그 조건이 뭐냐는 것이다. 일단 기대의 초점은 소시민으로 성공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 십일조와 주일성수, 그리고 목회자 섬김이 기본이고, 여기에 새벽기도와 각종예배, 그리고 건축헌금이 추가된다. 사실은 방언기도와 금식기도도 들어간다.

  간증이 잘 보여주듯이 이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라, 자기 세계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대개의 간증은 역경-믿음-(역경)-헌신-성공의 단계를 밟는 내러티브로 구성된다. 이러한 성공 서사는 이른바 고지론적 접근방식과 직결된다. 내가 성공해야 사람들이 전도가 된다는 방식인 것이다(이는 현세에서의 기복적 믿음을 추구하는 한국적 집단 무의식과 무관할 수가 없다).

  매일 새벽 두 시간을 방언으로 기도하니 두 번 읽으면 사진처럼 기억되는 능력을 받았다는 원종수 목사의 간증을 기억하실 게다. 이를 면밀하게 훑어보면 총체적으로 한국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간증의 진위 여부를 논하는 게 아니라 그의 체험에 한국 교회 특유의 신학과 프레임으로 촘촘하게 직조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국적 문화가 내면을 잠식한 것이다. 

  앞서 간증의 속성으로도 암시되듯이 한국 교회가 신자의 꿈과 희망을 뽐뿌질하는 방식은 자기계발적인 것이다. 즉 스스로 돕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전초 기지라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그리스도의 몸이 구현되는 방식이 서로 돕는 하나님 나라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 현실의 한국교회는 각자 도생의 모습을 조장하고 있다.

  그 방식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 모두 지속되어왔다. 한 면으로는 윤리적 자기계발을 추구한다. 교회 안에서 충직한 일꾼이 되어야 하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이런 면에서 충실한 훈육 프로그램을 제공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근대화 초기 자기계발의 사회적 기능은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대도시 공단에 몰려오는 청년들을 성실한 노동자로 호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초점은 정치적 권세에의 순복과 경제적 권력에의 순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사실에 있다. 국가 권력이 대형교회를 사랑하는 것만큼 대형 기업 또한 마찬가지로 호감을 표시했다. 결국 기업과 교회가 동일한 주체화 양식의 추구를 통해 하나가 된다. 기독교 사업가들이 회사 내의 노조를 싫어하는 것은 목사님들이 비판적인 성도를 싫어하는 것과 원리상 동일하다.

  한국 교회와 목사들이 유독 독재자를 사랑하는 모습은 물론 병리적인 현상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이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특히 <자유로부터의 도피>). 그러나 이는 동시에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자임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초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교회-기업-정권은 국가 발전을 위한 삼위일체로 존립해왔다. 

  다른 한 면으로 한국 교회는 신비적 자기계발을 추구하는데, 역시 그 본질은 동일하다. 이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공동 개척자 조용기 목사가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요한3서 2절에 등장하는 간구의 내용을 약속의 내용으로 해석한) 그의 삼박자 축복은 명백히 신사고 운동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 노만 빈센트 피일 목사가 그의 멘토이고, 로버트 슐러 목사는 절친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이 실은 자기가 제안한 새마음 운동에 연원한다고 주장할 만큼 양자는 상동적이다(‘잘살아보세’라는 구호가 삼박자 축복에 겹친다) 여기에 결여된 것은 사회적 차원의 윤리다. 윤리적 차원이 결여된 이러한 입장은 한국의 무속 신앙과 잘 맞아떨어진다. 무속 신앙도 무(無)윤리적이며, 내세의 심판이 아니라 현세의 축복을 추구한다. 

  이러한 양태에 균열이 발생한 것은 90년대, 문화의 시대가 열리면서부터이다. 급속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근대화 과정의 동요가 문화라는 범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의 변화는 교회의 변화로 직결되었다. 아니, 실은 여기에서도 교회가 선도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바로 힐링이다. 한국의 힐링 문화는 기독교가 주도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조용기 목사를 포함한 한국의 부흥사들은 재정의 풍요와 더불어 육체의 치유를 말하였다. 하지만 이제 새롭게 대두된 치유의 대상은 육체가 아니라 심리(정서와 무의식)이다. 여기에도 두란노서원에서 출간한 저작인 데이빗 시맨즈의 <상한 감정의 치유>로 은혜 받은 분들이 계실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심리적 자기계발의 등장이다. 자기계발의 진화라고 봐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