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일 소장 /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0. 복음주의 운동의 바닥을 보면서
기윤실 조사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 신뢰도가 2008년 18.4%에서 2014년인 올해 8.4%(기윤실 조사)로 추락했다. 2010년까지도 17%대를 유지하다가 올해 절반으로 떨어진 것이다. 100명 중에 92명이 기독교를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다. 대다수가 못 믿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게 들린다. 상황이 안 좋을수록 전통적인 사역, 복음전도와 제자훈련에 더 매달려왔던 복음주의 진영에 빨간 등 번쩍이면서 귀를 찢는 경보음이 들려오는 것 같다. 누구도 게으르지 않았던 것 같고, 항상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멀어져가고, 우리들은 피곤해 할까?
8.4%라는 숫자가 이 답보 상황 전체에서 ‘일단 나오라’는 신호로 읽힌다. 나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 전도, 양육에서 손을 놓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낯선 사회참여로 뛰어들 것인가? 로잔에서 전도와 사회참여의 절묘한 균형을 맞춰준 지도 40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교착상태에 있는 복음과 사회라는 복음주의 진영의 난제를 풀어 줄 단어가 하나 나타났다. 바로 ‘공공성’이라는 말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고심해오던 신학적 주제였다는데, 요즘 다시 보니 왜 이리 신선한 얼굴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복음주의 운동은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 활로는 본연의 분수와 소명을 알고, 시대적 과제와 씨름하는 데서 찾아질 것이다. 필자의 주된 관심은 특별히 복음주의 대중을 어떻게 공공의 장으로 나오도록 설득할 것인가에 맞춰져있다. 이번에 새롭게 공적 신앙으로 표현되는 복음주의운동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첫째 복음주의 대중에게서 이해할 것은 무엇인지, 둘째 공적 신학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지 셋째, 공적 신앙으로 가는 기본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 복음주의 운동의 활로 – 사회참여?
1) 대부흥기 역동적 사회참여의 기억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이 사회참여의 근거로 찾는 역사적 시기는 18·19세기 대각성과 부흥운동기이다. 이 당시는 영적 부흥과 사회참여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특히 19세기 전반부에는 매우 역동적인 경향을 띠었다. 사회참여에 대한 동기도 신학적으로 매우 단순했다. 2차대각성 운동 시기에 부흥운동 지도자였던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상태로서의 성결’을 지상에서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1].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종말론은 지상의 역사와 천년왕국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보는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이었다. 피니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미국이 가장 먼저 버려야할 것을 노예제도라고 지적하면서[2] 반노예제 운동에 신학적 동기부여를 하였다. 그의 부흥운동은 이어서 여권신장, 빈민목회, 사회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면서, 금주운동과 평화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연초 불매, 교도소 개혁, 매음 금지, 흑인개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같은 시기에 선교열도 고조되어 대학생들의 자발적인 해외선교운동도 시작되었다[3].
같은 시기 영국의 복음주의 국교도였던 월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19세기 초반부터 노예제도폐지운동을 벌였고, 샤프츠베리(Lord Shaftsbury)는 공장노동자의 인권과 노동시간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영국 복음주의 귀족들의 사회참여의 동기는 노골적인 죄악과 고난의 제거와 관련되어 있다. 일반역사에서 평가하듯 인도주의적 동기와는 다른 것이었던 것이다[4]. 당시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전도와 사회참여가 분리되지 않은 채 활발했던 것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해를 개인의 실패와 죄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구조적 가난의 실체(The reality of structural poverty)’에 대한 접근이 일어나지 않았었고, 사회참여는 사회복지적 차원에서 실천된 것으로 오늘날 의미의 사회적 행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5]. 19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보여준 사회참여 사례가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을 반성하게 하는 역사적 사례인 것은 틀림없으나, 전통적인 신학에 근거하여, 개인주의적이고 윤리적인 경향을 띠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오늘날 공공영역에 대한 복음주의자의 행동의 완전한 모델로 삼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아직까지 신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이 필요할 만큼 사회악이 구조화되어 있지 않았고, 그것에 대항할 때 야기되는 신학적 오해가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참여는 자연스럽기까지 했을 수 있다.
2) 신복음주의의 등장과 로잔언약
사회참여가 활발했던 시기를 뒤로하고, 자유주의신학, 다윈(Charles R. Darwin)의 진화론 등의 도전 속에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이 풍미하는 20세기 전반기부터, 중산층으로 성장하면서 보수화한 복음주의 기독교는 더 이상 사회참여의 신학적 동기를 찾기 어려웠으며, 사회참여영역을 사회복음운동 진영의 독점적 과제로 치부하면서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 시기를 복음주의 진영의 사회영역에서의 퇴거를 두고 티모시 스미스(Timothy L. Smith)는 ‘대역전(The Great Reversal)’라고 부르기도 한다. 같은 시기 자유주의와의 논쟁 끝에 사회, 문화영역에서 고립된 보수적 기독교 그룹은 ‘근본주의’라는 부정적 이미지 속에 한동안 갇혀있었다.
1940년대 이르러 칼 헨리(Carl H. Henry)는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이라는 책을 통해 보수 기독교 진영이 성경의 진리를 현대 문제에 효과적으로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을 자극하였고, 1950년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주도하는 개방적인 복음전도 집회가 폭발적 호응을 받으면서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라는 이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세상에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6].
당초 근본주의자들은 세속화가 교회와 문화 안에 꾸준히 진행될 것으로 봤고, 남부 복음주의 기독교가 그렇게 전국적 영향을 미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성장할 것 같던 진보교단은 내리막을 걸었고, 복음주의와 보수주의 교단들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 개혁의 기치를 든 신복음주의는 복음주의의 부흥 가능성을 예견했다. 그들은 ‘근본주의의 목소리를 조금만 둔화시키면, 복음적인 기독교가 미국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미국 복음주의가 조직화되면 미국문화 안의 강력한 세력이 되고, 반 세속화 운동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7]. 애초부터 복음주의 진영은 자기 정체성의 확보와 영향력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고 그것이 광범위한 복음주의 연합운동을 추동시킨 것이다[8].
활기를 되찾아가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다. 여러 모양의 복음주의 대회마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둘러싼 긴장과 논쟁이 벌어졌다[9]. 논쟁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난 1974년 로잔대회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로잔언약 5항으로 정리되었다.
“사람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사회 행동이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가지 부분이다”[10]
1950년대 전후로 논의가 깊이있게 진행되던 WCC의 사회참여론에 비하면 시기적으로 응답이 늦은 셈이었으나 1970년대 WCC 측의 급진적인 사회참여신학에 근거한 전통적 해외선교 포기론을 방어하면서, 그리고 복음주의 진영의 복음전도 중심주의를 아우르려는 균형 잡힌 복음주의적 선교론이 제출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후로도 89년 2차 마닐라 대회까지 활발히 진행되던 로잔운동은 2천 년대 전후로 한동안 침체되었다가 다행히 2013년 3차 케이프타운 대회로 재개되어 로잔언약의 원래정신을 계승하면서 사회참여와 화해의 사역 정신을 견지하고 있으나, 실제로 세계 복음주의 진영의 사회참여 운동을 자극할 만큼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그러나 신복음주의 연합운동은 초반의 낙관적 기대와 달리 19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성경관을 둘러싼 논쟁으로 다시 분열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뉴스위크지가 ‘복음주의자의 해’라고 했던, 복음주의신앙을 고백하던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던 1976년 신복음주의 연합의 소망은 사라졌다. 그 해에 ‘성경무오성’ 관련 투쟁이 내부적으로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정체성에 대한 일치를 유지하는데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11]
한편, 복음주의 진영에서 본격적인 정치참여에 선례를 남긴 것은 근본주의 진영의 ‘도덕적 다수’ (Moral Majority)운동이었다. 1979년 복음주의가 재흥하고 다양성이 늘어나고 있을 때 도덕적 다수운동이 등장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 제리 팔웰은 분리주의적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몰몬교, 가톨릭, 재림주의, 신복음주의까지 포괄하였다. 이들은 실제로 분리주의와 타협을 통한 영향력 행사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12]. 복음주의의 총체적 선교운동이 확실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복음주의운동의 활성화된 에너지를 정치적 우파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 진영이 발 빠르게 소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와 유사한 현상이 2000년대 중반 한국 보수 기독교의 편향적인 정치참여로 나타난 바 있다.
3) 한국복음주의운동의 사회참여
우리나라의 복음전도 일변도의 복음주의 운동이 사회참여에 눈을 뜬 것은 광주 민주화운동때문이었다. 군부독재정권의 폭압 속에서 보수적 기독교 청년층이 사회적 각성이 시작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신학, 기독교 세계관 운동, 로잔언약 등 복음주의적 사회참여 이론도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의 복음주의 연합 운동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정선거 감시단에서 첫 결실을 맛보았다. 그 후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복음주의 대학생 및 지도자들의 연합을 통해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경제정의실천연합’, ‘남북나눔운동’. ‘좋은교사운동’ 등으로 점점 전문화하면서 활동이 이어지고 있으나, 과감하게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직접적인 개혁운동에 나선다거나 사회적 정책대안을 생산해내는 연구활동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교육 분야의 사회참여 사례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2008년)이 눈에 띠는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지난 30여 년 간 진행되어 온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사회참여 현황을 보여주는 도표이다.
<표> 1980-2010년 복음주의운동의 사회참여 현황[13]
시기 구분 |
대표 지도자 |
대표 운동 |
중심 대중 |
비고 |
1.준비기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 ∙유신종식과 군부독재지속 |
∙프란시스 쉐퍼 ∙존 스토트 ∙대천덕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82년) ∙기독교학문연구소(84년)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85년) ∙코스타(86년) |
∙소수 일반대학원생 으로 시작 |
∙세계관 세미나가 복음주의 운동 차원으로 전개 |
2.연합운동기
∙7·80년대 중반- 90년대 초반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화 시기 |
이만열/손봉호 홍정길/박철수 이문식/고직한 김진홍/서경석 김동호 |
∙기독교윤리실천운동(87년) ∙기독법률가회(87년) ∙공선협(89년) ∙선교한국(88년) ∙학원복음화협의회(89년) ∙경실련 기청협(89년) ∙복음과상황(91년) ∙남북나눔운동(93년) |
∙선교단체 대학생 ∙대학기독인연합회 ∙지역교회 청년부 ∙복음주의 대중의 형성 |
∙복음주의 진영의 조직화를 통한 구체적 사회참여 구체화 |
3.잠복기
∙90년대 초반- 2천 년대 초반 ∙민간정부의 민주화 시기 |
∙새로운 리더십 부재 |
∙좋은교사운동(95년) |
∙지역교회 대형 청년부 ∙선교단체 대학생 감소세 ∙복음주의 대중의 잠복 |
∙사회참여의 에너 지가 교회와 해외 선교로 수렴됨 |
4.전문화시기
∙2천년대 초반-현재 ∙민주화 퇴행 시기
|
백종국/박득훈 김회권/김형국 김형원/김동춘 구교형/송강호 송인수/양희송 윤환철/황병구 김근주 |
∙뉴스앤조이(2000년) ∙개척자들(2001년) ∙교회개혁실천연대(2002년) ∙청어람아카데미(2005년) ∙기독청년아카데미(2005년) ∙성서한국(2005년) ∙한반도평화연구원(2007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2008년) ∙기독연구원느헤미야(2010년) |
∙복음주의 대중의 분화 및 이탈 ∙가나안 성도 등장
|
∙우경화된 일부 기독교지도자들과 개혁대상이 된 교 회 현실 속에 복 음주의 대중의 교회이탈과 전문 화(학술,교육, 통일, 공동체) 경향 |
표에서처럼 복음주의 진영의 사회참여양상이 조금씩 다양화, 전문화되어가고 있지만, 여러 곳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사회중심의 공적 현안을 향한 침투능력과 침투의지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부터, 복음주의권의 보수적 대중을 설득할 논리와 치열성을 갖고 있느냐는 등등의 측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2.공적신앙 형성의 장애물
공적신앙이라는 다소 다른 각도의 복음주의운동의 구현이 답보상태의 사회적 신뢰도와 참여의 실효성을 끌어올릴 수 있기 위하여 이해하고 갈 것들이 있다.
1) 복음전도 우선성 문제
기본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사회를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으로 본다. 따라서 사회의 문제들도 개인문제의 모음에 불과하기 때문에, 개인이 일단 변화하면 사회의 변화는 연쇄적으로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개인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오직 복음전도로서 전도를 통해 개인의 심령이 변화되면, 개인의 삶이 변화되고, 그 결과 사회는 자동적으로 변화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변화를 위한 구조적 접근이나 사회적, 정치적 직접 행동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14]. 이들에겐 복음전도의 우선성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복음전도의 ‘우선성(Priority)’ 문제가 총체적 선교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복음전도의 ‘궁극성(Ultimacy)’ 개념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으로 복음전도 우선성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다. 그는 복음전도를 ‘우선성’의 차원으로 강조할 경우, 아무리 다급한 사회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해도, 실제 현장에서는 복음전도만 시행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때 사회참여는 전도의 동기부여용으로만 작동하게 된다. 전도자가 이같은 ‘우선성’ 중심의 사고를 유지하고 전도에 집중한다면, 그것을 보고 성장하는 후대 또한 같은 논리와 행동을 반복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적 책임은 명분으로만 의의를 찾을 수밖에 없다[15].
그러므로 복음전도의 우선성 논의가 선교현장에서 항상 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고, 그것이 예수님의 실제 선교행동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선교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마음을 다한 충성과 예배와 순종으로 그분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궁극적 가치임을 강조하게 되면 우선성의 이름으로 복음전도행위만을 정당화하는 일은 부자연스럽게 될 것이다[16].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는 아울러 선교가 ‘교회의 선교’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선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선교’의 정의를 새롭게 시도하였다. 종래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전체에 간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왜곡되면서, 선교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켰던 과거가 있었다.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갖게 되면, 교회가 주체가 되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교회를 보내신다는 개념이 생겨난다. 이 주장은 선교를 이방인 개종자로 채워진 교회세우기로 이해하던 전통적 이해를 극복하고, 다양한 선교현장에서의 사회참여를 선교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17]
2) 사회문제의 개인주의적 인식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이슈를 개인이 풀 수 있다는 신학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다. 미국문화의 특유의 긍정문화, 개인성공 신화 등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실제 사회는 엄연히 개인적 시각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거대한 비인격적 실체이기 때문에 일종의 사회학적 상상력(The Sociological Imagination)[18]이 발휘될 필요가 있다. 대개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환원, 축소시키려고 한다. 예를 들어, 사회의 빈곤은 빈곤층이 자초한 결과라거나, 그들을 외면하는 냉담한 사람들이 문제라거나, 사회의 범죄율이 높은 것은 사악한 자들이 많아서라는 방식으로만 분석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Wright Mills)의 말대로 ‘사회적 이슈(social issues)’를 ‘개인적 고민(personal troubles)’로 환원해서 처리하려는 것이다[19]. 어떤 사회적 어려움도 개인의 굳은 신념과 의지로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성격을 무시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파악이 복음주의자의 공공적 인식을 높이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사회학의 사회 이해방법에 대한 도움을 받아 통전적 관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3) 역사적 반공주의
복음주의의 사회참여를 말할 때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는지는 좀처럼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도움을 받거나, 혁신될 대상으로만 이해해왔다. 사회학자 강인철, 김동춘, 종교학자 류대영 등은 한국개신교의 독재정권과의 유착현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왔다[20]. 특히 김동춘은 한국사회의 갈등 양상이 지나치게 폭력적인 것은 전쟁의 상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석해냈다[21]. 전쟁의 기억은 남한 사회와 개신교인들에게 강력한 반공주의를 심겨주었고, 남한 사회의 공적 변화를 요구하는 어떤 시도도 국론분열과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친북적 행동으로 환원하게 하는 근원적 요인이 되었다. 반공주의는 공적영역에 관심이 더 큰 진보적 개신교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70년대까지 기독교의 사회참여 주제였던 반독재 민주화 요구도 공산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 정도였다. 이처럼 반공주의는 보수, 진보를 막론한 사실상 기독교의 구원 교리로까지 격상되어 있다고 표현할 만하다[22].
반공주의를 표방하여 권력과 유착되었던 남한의 기독교는 상당한 혜택을 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보수적 개신교는 친미반공주의 기독교인인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고, 유신독재정권과도 일정한 협력하는 과정에서, 교회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남북화해모드로 일반사회에서 반공주의가 흔들리던 시기에도 기독교 뉴라이트 운동은 이전 우파보다 더 세련된 모습으로 반공주의 신념을 새롭게 포장하여 등장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선진화를 친북좌파가 가로막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고, 이들 좌파를 제압할 기독교적 개혁운동이 필요하다고 믿는다[23]. 게다가 공산주의 정권을 제거하지 않으면, 개신교의 존립이 위태롭다고 믿는 한 선악 이원론과 폭력의 정당화 같은 반 기독교적 정신이 한국기독교인들의 의식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와 개신교를 관통하는 중대한 이념이 아닐 수 없다. 보수적 개신교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복음주의 운동이 사회참여를 하는데 이런 반공주의 신념은 자기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개신교 반공주의 문제는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진영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살아있는 장애물이다. 오늘날 사회참여적 복음주의가 일정한 공적 영역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반공주의를 종교화 단계로 들어가게 했던 한국전쟁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상처에 대한 사실적 이해와 공감이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3.복음주의운동, 공공신학과 만남
1) 공공영역의 발견
‘공공성’(public) 개념은 종교의 사회지배를 물리치고 계몽주의가 확보한 일반인들의 공동 공간이 탄생하면서 나온 것이다. 공적 영역을 과거 교회나 국가가 독점하고 있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 시기부터 기독교는 사사화(Privatization)되어갔다. 일종의 개인영역, 교회영역 안으로 가두어갔다는 뜻이다. 사회철학자 하버마스(Jüren Habermas)는 공공성이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그 사이에 여론과 같은 것이 형성되는 사회적 삶의 영역’이라고 했다[24].
2) 공적신학의 등장
대체로 1980년대 종교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신학의 성격을 공적신학(public theology)[25]이라고 언급한데서 유래한다. 주로 종교를 사회와 유리된 개인의 취향으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 신학을 가리킬 때 사용하고 있다[26].
공적신학은 다양한 신학 전통에서 전개되었는데, 등장 시기는 언제나 기독교의 사사화 경향을 극복하고, 사회적 갈등 앞에 종교의 공적 역할이 요구될 때였다. 사실상 신학적 자유주의 경향이나 에큐메니칼(Ecumenical) 진영의 신학 경향과 유사하기 때문에, 후기자유주의(Post-Liberal) 신학이나 포스트모던(Post-Modern)신학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대체로 미국의 공적신학자들의 경향은 후기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재세례파 등의 신학전통의 다양한 조합 속에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은 신학이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공적 담론으로 전개되어,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시카고학파의 흐름과 더욱 기독교적 관점과 정체성을 가진 이야기(narrative)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공적 이슈에 응답하려는 예일학파의 흐름으로 나뉜다.[27]
복음주의권에서는 공공신학의 자극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스스로의 신학방법론으로 채택해서 적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정립의 기간이 충분히 지난 만큼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공공영역을 확인하고, 공공적 실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선행연구로 공적신학은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다. 한국에서도 2천 년대 중반부터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와 에큐메니칼 경향의 띤 장로회신학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신학, 공적신학의 이름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 한국의 주류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추락하고, 기독교 뉴라이트 운동이 등장할 때 일종의 대응담론으로 소개되었다. 기존의 해방신학, 민중신학과 같은 급진적 성향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교회 내부에 매몰되는 경향은 극복하고 있고, 무엇보다 전통적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참여를 모색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시사점이 많은 신학이라고 판단된다.
3) 복음주의 운동에 던지는 시사점
복음주의운동이 공공적 신학을 모색할 때 특히 도움이 될 만한 신학 작업이 앞선 공공신학자들에게 있었다. 그중에 필자는 세 명의 신학 작업에서 복음주의 운동에서 참고할 만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국의 공적 신학자 던컨 포레스터(Duncan Forrester)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영국사회에 닥친 위기 곧,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분배, 냉전이후 국제안보상황, 사회주의권붕괴 이후 진보정치, 복지개혁문제 등에 대처하기 위해, 신학자, 사회과학자, 정책입안자, 실천운동가 등과 간학문적인(cross-disciplinary) 대화를 통해 공적신학을 전개해왔다[28].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정체성만 갖고는 사회의 공적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감하게 일반학문 연구자들과 운동가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간다면, 정부 단위의 정책대안보다 더 공공적 이해가 깊은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도마키 후카이는 일종의 분리주의적 공적신학을 전개한다. 그에게 공공성은 국가와 개인을 중재하는 개념이다. 이런 공공성은 자발적인 결사체인 교회가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국가주의에 협력했던 교회역사를 안고 있는 일본 기독교는 국가주의에 유착될 소지가 있는 신학의 사회적 성격을 지양하고, 오히려 교회를 통해 철저히 분리된 국가와 교회 사이에 새로운 공적 세계를 탄생시키는 기능을 감당하려는 시도를 한다[29].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는 국교의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도 해방 이후 일종의 반공주의적 국가수립에 기여하려는 국가종교적 기능을 감당한 바가 있다. 후카이의 국가와 철저히 분리되는 것을 전제로 공공적 역할을 감당하는 자발적 교회의 모습은 충분히 복음주의 운동이 참고할 부분이라고 하겠다.
미국의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는 교회의 직접적인 사회참여보다는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를 구성하는 이야기(narraive) 윤리에 강조점을 두는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여러모로 대비되면서도 개인신앙과 교회전통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적 경향[30]을 띠고 있어, 장로교 신학자들에게 주목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공적신학은 여러 학문과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공적 논쟁을 다루어 시민사회를 위하는 일종의 기독교사회 윤리학이다[31]. 그는 공적신학을 ‘공적인 논쟁들이나 문화, 사회, 과학, 기술, 경제, 정치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신학의 한 종류이며, 또한 비기독교 전통들이나 사회과학, 역사와 더불어 비판적인 대화를 하고자 하는 신학의 한 종류’라고 정의하였다. 기독교의 본질에 공적인 특징이 있고, 사회 각 분야는 반대로 신학적 구조가 있기 때문에, 사회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변증적 공공신학을 전개하려고 한다. 개혁주의적 정체성을 가지고 사회참여를 하려는 복음주의 진영에게 곧바로 적용될 만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이 사회참여의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정립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미 공적신학은 나름의 신학전통과 다양한 방법론으로 사회문제에 대응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신학적 방법론이나 전제와 관련한 논쟁에 휘말리기보다 그들이 먼저 포착한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적용 시도는 잘 분석하는 것이 순서이다. 지금 사회적 신뢰도는 물론이고 사회문제에 대응능력이 현저하게 낮아진 복음주의 진영에게는 평가보다 배움이 더 절실한 상황이다.
4. 교회병행단체의 복음주의 운동
1) 교회의 한 축으로서의 교회병행단체(Para-Church)
한국 개신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교회에 대고 직접 호소하는 일처럼 황망하고 무력한 일도 또 없을 것이다. 개별 교회의 어떤 단위에서 우리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인가?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결국 교회 직제에서 자유로운 청년층, 주중에 활동이 가능한 집단, 리더 재생산구조가 있는 집단일수록 높아진다. 그곳은 바로 교회병행단체이다. 교회병행단체 혹은 ‘패러쳐치’ 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학생 선교단체이지만, 해외선교사 파송선교단체, 기독교구호단체, 기독시민운동단체 등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진 평신도 운동조직은 다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교회병행단체는 본연의 위상이 성경적으로, 교회사적으로 이차적 교회기능을 감당하기 때문에 다소 위축된 자의식을 갖고 있다. 선교학자 랄프 윈터(Ralph D. Winter)는 교회의 이중구조’의 역사를 살피면서 교회는 처음부터 모달리티(Modality)와 소달리티(Sodality)라는 두 가지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32] 말하자면 애초부터 교회를 교회사적 근거에 따라 지역교회(local-church)와 교회병행단체[33]로 나누어 인식한 것이다. 이를테면, 안디옥 교회와 바울 선교단, 중세 교회와 수도회, 개신교와 선교단체 등의 관계는 각각 모달리티와 소달리티를 표현하는 것과 같다. ‘
랄프 윈터는 교회사에서 보여준 교회병행단체들의 기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루터교가 경색되어가던 17세기, 스페너가 자발적으로 조직한 경건주의 운동이 아니었다면 개신교는 개혁 전통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는 교회사적으로 가장 역동적이고 큰 규모의 결과물을 남긴 것은 웨슬리의 메소디스트(Methodist) 운동이었다. 그는 백만 명 가량의 추종자를 보유했음에도 영국 국교회를 대체할 모달리티적 교회구조를 회피하고 소달리티 형태를 지켜낸 바 있었다[34].
근대선교의 아버지라는 월리엄 캐리는 이방인 회심을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어떤 ‘수단들(Means)’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통해 침례교 선교회를 조직해낼 수 있었다. 여기서 ‘수단들’이란 바로 소달리티, 곧 교회병행단체였다. 이 조직을 시작으로 다양한 배경의 선교단체가 조직되어, 일부는 교단 산하 선교부로 편입되고, 일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개신교의 선교운동은 비약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3백 년 동안 잠재되어있던 선교 에너지를 교회 곁의 선교단체를 통해 분출할 수 있었다[35].
특히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대학생 선교단체는 이른바 ‘위대한 선교의 세기’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2차대각성 운동의 에너지는 이들 자원적인 교회병행단체들에 의한 것이었다. 1810년 사무엘 밀즈 등 월리암스 대학의 학생들은 회중교회 총회에 인도 선교를 신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교단 측은 외국선교를 위한 미국선교부를 세웠다.[36]. 원래 복음주의 대학생선교단체로 시작한 YMCA는 SVM(Students Volunteer Movement, 대학생 선교자원자 운동)의 세계화에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 단체는 영국과 미국 대학생들의 해외 선교 헌신을 이끌어내었고, 20세기 초반 복음주의 기독교의 세계적 확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
현대적 의미의 교회병행단체는 1920년대 근본주의 교단 안에 부흥운동 전통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북부의 주요교단에서 분리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근본주의 진영이었지만, 여전히 부흥전통도 그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영혼을 구하는 전도가 제일의 관심사였다. 근본주의 교단의 경직된 사업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부흥사들은 훗날 빌리 그래함이 그랬듯이 기존 교단과 초교파적 협력을 꺼리지 않았고, 자체 복음전도기관을 설립하여 교단을 도왔다[37]. 한국의 들어온 선교단체들은 이런 근본주의 운동 내부의 부흥전통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의 선교단체들이 전도를 위한 초교파적 연합에는 능하나 사회참여를 위한 연합의 시도가 쉽지 않은 것은 이런 근본주의 신학과 부흥운동이라는 이중적 전통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2) 교회병행단체의 자율적 특징
교회병행단체는 한마디로 개신교 평신도의 자발적 헌신이 만들어낸 교회의 또 다른 형태이다. 지역교회의 세례와 성만찬기능을 제외하고는 교회적 기능을 상당히 감당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단체들이다. 이들은 주중에 정기모임을 하고, 유기적으로 짜인 리더훈련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개신교인들의 인적, 물적 후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특이한 점은 개신교단 차원의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보다는 평신도 개인후원과 자기 단체 출신자들로부터 후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독특한 후원구조가 복음주의 대학생선교단체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독립성이라는 특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단종파와 같이 개신교계와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고, 교단 내 산하기관처럼 종속되어 있지도 않다. 활동 인력과 자원을 개신교회와 공유하기 때문에, 교회와의 긴장과 협력이 불가피하다. 이 공존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교회병행단체는 교회가 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교회병행단체로 출발한 웨슬리 운동은 감리교단으로 재구성되었고, 미국의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은 한국에서 선교단체로 시작해서 성결교단화하였으며, 한국의 UBF(대학생성경읽기회)도 사실상 독자적인 교단 기능을 하고 있다. 반면 대다수 대학생 선교단체들은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교단 구조로 전환하지 않고 그대로 교회와 병행관계를 유지하면서 전문적인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병행단체는 자기 전문성을 활용하여 전문적인 성격을 고수할 수 있고 있고, 교회 기능을 사실상 실행하기도 하며, 나아가 교단으로도 전환, 성장하기도 했다. 여기서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개신교회 특유의 역동성을 살펴볼 수 있다.
3) 교회병행단체의 공적 기여 가능성
교회병행단체 중에서도 한국의 대학생선교단체의 경우, 복음주의적인 리더십 재생산구조와 지역교회가 확보하지 못하는 상대적으로 균질한 평신도 인력 네트웍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복음주의 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이같은 특징을 가진 대학생선교단체의 활동이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은 자기 역할을 너무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내부역사를 경건주의 선교운동과 SVM운동의 후예라고만 인식하고, 대학생 전도와 양육운동에 집중하는 것이다. 양육자나 선교사를 배출하는 데는 강점을 보이고 있으나 이들의 사회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공적 기여 사례는 많지 않다. 앞으로 대학생 선교단체는 자신들의 교회사적 위상 곧, 교회의 이중구조의 일원으로서의 재인식을 전제로 할 때, 자신들의 역사와 자산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한국개신교 생태계와 공적 영역에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5. 복음주의권에 대한 공적 도전의 전제
복음주의 운동은 보수적 개신교인들을 주된 청중으로 삼고 있다. 이들과 함께 공공적인 기독교 활동을 해나가려면, 이들의 신학과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상담에서도 먼저 공감적 경청에 집중하고, 그들의 말로 반응하는 과정을 중시하고 있다. 하물며 보수주의 정서가 강한 회중과 함께 하는데 이런 공감적 태도는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된다.
1) 복음주의의 보수적 정체성 이해
현대 복음주의운동을 1940년대 근본주의 진영의 자기반성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면, 복음주의는 그 출생 환경이 보수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신학을 근본주의와 공유하고 있다. 다만 좀 더 세련된 태도와 학구적이면서도 복음전도에 적극적이며, 사회적 이슈에 열린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들은 근본주의적 태도를 탈피하기 위해 19세기 개혁주의(Reformed)와 알미니안(Arminian)전통이 결합된 복음주의의 역동성을 재현하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미국 복음주의의 신학적 주도권을 가진 개혁주의 혹은 칼뱅주의 전통을 중심적 지위에 놓고 복음주의 운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학자군이 존재하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 운동도 진보적 기독교와 구별을 명확히 하려는 태도가 진취적인 사회참여를 하려는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한 경향을 보인다. 복음주의는 진보적 기독교의 대표인 에큐메니칼 진영을 항상 의식하면서 정체성을 가늠하고 있다. 그만큼 정체성이 행동보다 중요한 것이다. 80년대 이후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사회참여는 학생운동권을 의식한 것이었다. 그들의 자기희생적 참여에 고무된 바도 있었고, 그들의 방법과 차별된 참여를 하려는 의식도 있었다. 교회지도자와 청년선교단체지도자들이 연합하여 만든 학원복음화협의회의 설립동기가 막시즘이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학생 운동권을 견제하면서 효과적인 학원복음화를 하려는 것이었다고 전해질 정도이다.
그러므로 갈등이 첨예한 사회 현장의 중심으로 들어가 복음주의가 어떻게 하나님의 공적 특징을 대변할 것인가에 중심을 두기가 생각보다 어려울 것을 예상해야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회심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정체성을 보호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그 관심이 다른 이들도 같은 체험과 정체성으로 초대하려는 개인전도의 동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내재적 특징 때문에 복음주의 운동은 성경의 보여주는 통전적 전망을 실현시키기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 복음주의자의 종말론적 열망
복음주의 운동이 사회참여 혹은 공적 도전을 하려면, 2차 대각성운동시의 사회개혁의 모티브에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사회운동이론으로 무장된 운동가들이 아니었는데도 전도하는 일과 사회개혁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성결론과 종말론과 관련된 동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성결을 통한 주님과 연합의 열망에 방해물이 바로 죄악이었다. 그 죄악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성결에 방해를 하는 것은 제거할 대상이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현재 삶과 이어진다는 후천년적 재림사상을 믿는 이에게 노예제도나 여성의 인권 문제 등은 사회적 개선을 막는 요소였다. 사회적 개혁이 지연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늦춰지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에 적극적인 사회개혁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대주의 전천년 재림설을 믿는다고 해도, 사회개혁이 강하게 추진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재림의 긴박성 아래 자기 소명이 확실하게 인식되었을 때였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심을 확신한다고 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활 책임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내일 들려올라간다 해도,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고, 세계의 선교지가 우리와 함께 여기에 있다’[38]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 앞에서 지금 주어진 사명을 더 열심히 추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긴박성을 가장 잘 활용한 부흥사가 바로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였다. ‘지금 이 세대 안에 복음화를 이루자’는 그의 설교는 당시 영국과 미국의 수많은 복음주의 대학생들을 해외선교를 작정하게 했다. 대체로 전천년설에 가까울 보수적 기독교인들을 우리가 염두에 둘 때 시사하는 바가 큰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전통적 성결론과 종말론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헌신적인 사회개혁적 행동은 유발될 수 있는 것을 교회사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다.
6. 공적 신앙,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
때마침 『광장에 선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는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공적신앙'의 관점에서 복음주의운동의 공적 신앙 구현을 위한 두 가지 전제 조건에 대해 검토하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라는 최종적 비전이고, 둘째는 공존의 자세이다. 이 비전과 자세을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복음주의 운동의 공적 신앙의 구현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1) ‘하나님나라’의 신학적 검토
복음주의자들의 공적 신앙이란 대체로 개인과 교회를 넘어서 이 세상 속에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교회사적으로 그 ‘하나님나라’의 형태는 몇 가지로 제한되기 때문에 잘 검토해봐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주권이 기독교와 사회라는 두 영역에 실현되게 하는 것이다. 전자는 사실상 중세 가톨릭교회가 국가를 지배한 후 폐기된 것이지만, 실제로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욕망이기도 하다. 볼프는 이런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교회와 국가의 질적 차이를 분명히 구별하되, 세상 안에서 완전히 구별되어있지 않다는 관점과, 교회와 국가를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한다는 견고한 종교개혁자들의 관점이 우선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분이 잘못되면, 우리의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사실상 교황이 국가를 통치하는 신정국가적인 중세 가톨릭의 과거와 다를 바 없어지거나, 국가에 교회가 매여 버리는 나치즘과 같은 국가주의적 망상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이다. 사회 안에 국가와 교회가 존재하되,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가 철저하게 인정되는 관점이 우리의 공적신앙의 비전인지 반드시 확인해야한다[39].
2) 정치적 공존의 자세
볼프는 종교적 전체주의와 그와 정반대로 종교를 사적인 영역으로 가두려는 세속주의의 환경 속에서 기독교신앙을 어떻게 유지할 지에 대해 관심하고 있다[40]. 그에 의하면, 공적인 영역에서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그동안 신앙을 공적영역에서 아예 배제한 세속주의 지배전략을 간파할 때 가능하며, 동시에 전도를 통해 기독교 중심 국가를 만들겠다는 과욕을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지난 종교적 갈등의 역사로 미루어 볼 때, 어떤 종교 세력에게도 완승이나 완패가 없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17세기 신, 구교 간의 30년 전쟁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본 유럽사회는 ‘관용’ 밖에는 길이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는데, 이 합의가 종교를 공적 영역에서 밀어내려는 세속주의를 낳은 계기가 되었다. 이 계몽주의 전략에 따라 종교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적 영역에만 머물게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공적 감각을 상실한 보수적 기독교는 20세기 전반기 내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근본주의적 고립을 자초하였고, 협소한 개인구원의 복음 이해를 기반으로 선교 운동에 나섰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볼프는 유고연방에서 벌어졌던 종교와 인종간의 참담한 갈등을 경험한 개인사를 바탕으로, 고유한 종교적 정체성과 공공성에 대해 나름의 대안으로서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다원주의’를 제안한다.[41] 이것은 모든 종교는 한 근원에서 왔다고 종교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전형적 종교다원의 논리가 아니다. 각자는 자신의 신관을 견고히 유지하면서도 남의 종교와 경전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해주어라’(마7:12)는 보편성을 띠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과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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