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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9.

아볼로 클럽 철학 세미나

6주차 강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

 

강사: 김동규(서강대)

 

<현대 종교철학의 흐름들>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기여 이후에 현상학 진영과 해석학 진영에서 하나님을 다시 사유하는 흐름이 생겼다. 92년에 현상학과 신학에 관한 컨퍼런스가 열렸다. 우리가 침묵했던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들을 꼽자면, Michel Henry, Jean-Luc Marion, Jean-Luc Etien, Jean-Yves Lacoste, Claude Romano, Immanuel Falke(마리옹의 제자, 파리 가톨릭 대학교 연구소 소속) … 이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하이데거와 후설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 사람들을 계승한다. 논의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앙리를 제외하고는 다 가톨릭 철학자. 앙리는 개신교인. 현상학은 의식 속에 주어지고 나타나는 것에 대한 해명이다. 현상학적 환원. 앙리 같은 경우는, 철저히 내재적으로 환원시킨다. 그리스도인은 초월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환원의 끝에 남겨지는 것은 감각적인 촉발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삶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의 삶에 가장 깊이 내려오신 분. Incarnation이 이를 잘 보여준다. 성육신은 원초적으로 감각적인 것이다. Flesh/Body. 근원적인 살의 경험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과 말이다. 마리옹 같은 사람은 훨씬 더 신비신학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게 무한한 거리에 있는 분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사유를 뒤집어서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존재와 존재 너머 사이의 거리다. 크레티앙은 부름과 응답의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기술한다. 라코스테는 이 중에서 가톨릭적 성향이 매우 짙다. 마리옹만 해도 신학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지만 라코스테와 팔케는 신학적인 색채가 매우 강하다. 라코스테는 전례(Liturge)에 집중한다. 신 앞의 존재가 초월을 경험하는 것은 반드시 전례의 경험을 통해서다. 이 전례가 어떻게 현상학적으로 우리에게 반응되는지를 설명하려 애쓴다. 전례의 경험에서 절대자에 대한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려 한다. 팔케는 마리옹을 이어받아서 성서의 내용을 현상학적으로 하나씩 다 해설한다. 탄생, 부활, 고통 등의 주제를 다룬다. 마리옹은 인간의 유한성보다는 신의 무한함에 더 초점을 맞춘다. 신비주의는 두 가지 흐름 1. 신비적 합일/인간이 신비를 경험하는 방식: 플로티누스(일자와의 합일 문제) 2. 하나님의 신비만을 이야기함: 마리옹.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에 집중한다. 팔케는 이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유한함 때문에 신적인 현상인 초과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방식이다.

 

해석학적 흐름도 있다. 대표적으로 메롤드 웨스트팔. 우리와 가장 신앙 정서가 비슷할 것이다. 개혁파 교회의 장로.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조차 힘들 것이다. 우리 신앙은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인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근거 세 가지 1. 존재신론의 문제. 과연 우리 하나님이 존재신론으로 포섭 가능한가? 아니라는 것이 포스트모던적. 2. 우리의 자아는 탈중심화된(decentering) 자아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키에르케고어에 많이 의존한다. 3. 해석의 문제. 특히 이 세가지를 놓고 보면 우리 신앙은 포스트모던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많다. 1. 하나님은 존재 안에 계신 분이 아니다. 존재 너머서 있다. 이는 학자들을 통해서 인정된다. E.g.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개신교에서는 교부문헌을 열심히 안 본다. 큰 문제) 위디오니시우스는 hyper-on(존재를 넘어선 하나님)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이름 붙일 수 없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찬양과 기도 밖에는 없다. 신비신학은 찬양과 기도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하이데거에게서 봤던 것처럼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근대적 신에게 찬양하고 기도할 수 없다. 신 없는 신이 오히려 더 신다운 신일 것이라고 한다. 이것과 완전히 대응되는 것이 위디오니시우스다. 우리는 신 없는 신에게 찬양과 기도한다. 존재를 넘어선 신을 전제할 때에만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반드시 포스트모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웨스트팔의 주장. 2. 자아는 깨진 자아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 자아는 깨진다. 키에르케고어에게서 전거를 따옴. Becoming oneself 자기가 되어가는 과정이 자아다. 실체로서 동일한 존재로 늘 지속하는 자아가 아니다.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삼 단계 이론: 1) 본능적 단계. 한계에 부딪친다. 인간은 만족을 못 한다. 2) 신비적, 도덕적 단계. 도덕 법칙의 준수를 통해서 완전한 자아에 이르려 함. 하지만 이것도 안 된다. 율법을 지킬 수 없다. 3) 종교적 단계. 도약. 도약은 능동적인 계기가 아니다. (최근의 키에르케고어 해석). 이는 일종의 역설적인 상황. 하려고 하는데 안 된다. 그 상황에서 그 다음 단계로 떠밀려 나가는 것이다. 자기초월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는 포스트모던적이다. 3. 해석학적 차원의 두 가지 계기. (1) 혐의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 우리는 사순절에 니체, 프로이트, 맑스를 읽으면서 우리의 죄를 되돌아볼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은 의심을 거쳐서 확신에 이른다. 그리스도에 반대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되짚어볼 수 있다. 종교비판은 나름의 타당성을 각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포스트모던 해석학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이 성서라면, 이것이 즉각적인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성서를 포스트모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해석을 해야 한다. 해석학이 주는 가장 중요한 통찰은 인간의 유한성이다. 우리는 이해의 선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해한다. 이는 인식의 유한성을 보여준다. 이를 신학적으로 반성한다면, 우리가 원죄가 있다면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우리가 성서를 투명하게 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매개를 거쳐서, 지난한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성서를 읽는다. 우리는 한 가지 독법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성서 해석 자체도 포스트모던적이다. 이게 웨스트팔의 논의다. 현대철학에서 포스트모던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종교철학자가 웨스트팔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철학을 하는 한 가지 방식. 1) 현대철학을 그리스도 신앙의 반성의 계기로 사용하는 것. 반성의 교사.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에 충격을 준다. 2) 철학계에 충격을 줄 수도 있다. 일반 학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키에르케고어 해석, 아퀴나스 해석 등.

 

자크 데리다 그리고 이들을 이어받은 드 브리스, 존 카푸토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 과연 종교 없는 종교가 가능한가? 이는 데리다가 말한 것이었고, 카푸토는 이와 더불어 하이데거적인 영향이 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관심을 가지고 나서 데리다를 공부함. 카푸토에게서 제도화된 종교는 중요하지 않다. 이를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존재신론을 벗어나는 것이다. 신은 힘 없는 자의 신. 그리고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신. 우리는 드러나는 사건을 통해서 신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은 교리에 갇히지 않기 때문에 흐릿하게 드러난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유의해서 봐야 할 사람은 리처드 커니다. Anatheism(다시-신론). God to maybe(가능성으로서의 신).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미 있는 이야기. 신은 누구일까? 니콜라스 쿠자노스로 가야 한다. “가능성으로서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그래야 종말론의 의미가 산다. 할 수 있음이 있어야 종말론적 비전이 가능하다. 커니는 상상적이다. 하나님은 가능성이고 미래적으로 온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상상력과 내러티브다. 우리의 신앙을 상상과 이야기라는 틀로 재구성해야 한다. 다시-신론을 구성하는 데 많은 참고를 한 것이 본회퍼다.

 

*신학의 신론과 철학의 신론은 어떻게 다른가?

신학은 좀 더 교리에 천착한다. 교리가 규준 역할을 한다. 제도 교회에서 나름 통용될 수 있고 제도교회 관습에 적합한 신학을 형성할 수 있지만, 상상력을 제한하기도 한다. , 신학은 성서에 집중한다. 여기서 성서는 교리의 기준을 통과한 의미에서의 성서다. “교단 신학”. 반면 철학에서는 그런 관습이나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위험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정형화된 틀에서 주는 안정감 또는 고착성을 벗어나서 사유하게 해준다.

 

 

<참고자료 읽기>

 

*강영안, “두 공동체 소속 문제로 본 그리스도인 학자의 정체성

 

그리스도인 학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좋은 학자로서의 요건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를 추구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학문으로서의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 등.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글을 쓰고, 좋은 책을 번역하는 것 등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선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늘 꾸준히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여태까지 한국교회에서 해왔던 담론 형성이나 학자를 대하는 태도가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사) 유명해져야 말을 듣는 현상은 잘못되었다. 용기 있게 그리스도인 학자의 정체성을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