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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앎의 언어와 삶의 언어.

삶으로 관통하는 직관이 없이 앎의 축적만으로 지혜로운 삶은 가능할까. 지혜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지혜롭고자 할까. 우리의 앎의 목적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데 그치진 않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앎은 활용되기도 하고, 전해지기도 하고,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어떤 의미가 되었든 앎은 그 배후에 보다 근원적인 삶의 '방향성'을 함의하고 있다. 과연 앎은 삶에 어떤 영향을, 얼만큼 줄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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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고대 : 진리(앎)의 인식.

'동굴에 갇힌 자들의 비유'는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의 중간에 나온다. 이것은 실재의 본성을 설명하는 플라톤으 이데아론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제공해 준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람들의 대부분은 갇힌 자들처럼 순전한 현상의 세계에 만족하고 산다. 오직 철학자만이 동굴 밖을 여행하여 실재 사물을 경험하는 법을 알려준다. 오직 이들만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일상적 지각의 세계는 변하며 불안전하다. 이데아의 세계는 오감을 통해서는 그것을 경험 할 수 없고 사유를해야한다.

플라톤은 <국가>의 정의에 대해 살펴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한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에 지혜, 용기, 절제가 있는 것처럼 정의로운 개인의 혼 속에 이성, 격정, 욕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세 부분이 서로 화목하고 조화를 이뤄야 겠지만, 그 중에 제일은 탁월한 이성에 있었다. 

밀레토스 학파,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우주론, 존재-우주-신론등 고대의 여러이론들이 나왔지만, 그들에게 앎은 곧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이었고, 가변적인 세상에서 삶의 안정을 지탱해주는 원천이었다. 고대인들에게 삶의 행복은 일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는데 있었다. 그들에겐 몸으로 하는 노동은 이성으로하는 관조와 같은 층위로 비교될 수 없었다. 앎은 탁월성(이성)에 입각한 영혼의 활동성이었지, 몸으로 부딪치는 땀과는 거리가 멀었다. 

ii. 중세 : 진리(앎)의 소유.

중세에 교두보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살펴보면, 중세의 앎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앎은 진리 그자체로는 부족했다. 다시말해 고대방식의 사유함 자체로는 진리를 이룰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는 인식이 아니라 신적 조명에 의해 진리를 소유함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삶의 행복은 우리 영혼이 진리를 소유하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 오는 은총이었다. 그의 지혜의 여정은 <고백록>의 짧은 한마디로 대변될 수 있다. "주여, 우리가 당신안에 거하기 전까지는 결코, 쉴(안식) 수가 없습니다!"

중세의 수도회(도미니크, 베네딕토, 프란체스코)의 전통들에는 여러가지 앎 추구의 방식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신중심주의 사회 안에서 인간의 앎이 사랑의 질서 안에서 어떻게 머물러 있느냐가 관심사였다. 중세인들에게 앎은 은총입은 영혼의 영역이었지, 몸으로 부딪치는 땀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iii. 근대 : 진리(앎)의 한계. 

앎을 향한 여정은 근대의 시대정신에 의해 무너진다.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면서, 앎과 지혜에 대해 과연 인간이 얼마나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앎의 사유함 자체(고대)가 지탄받았고, 은총에 의한 앎의 소유(중세)는 인간중심의 반동에 의해 철저히 검증되야 했다. 한다미로, 고중세가 지혜가 지고의 영혼너머에 "거기 그렇게" 있었다면, 근대는 "아니다. 여기 인간 주체안에 있다" 고 생각했다. 

칸트는 인간 앎의 한계를 인정했다. 앎의 구조를 면밀히 살펴보았더니(12개의 범주), 전체를 싸안아 알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었다. 우리는 직관(시간-공간)에 의해 인간 범주화에 의해 잡힌 것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당시의 이성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을 종합한 앎을 제시했다. 신은 이제 존재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불가지의 영역으로 멀어졌다. 

철학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근대시대는 인간의 앎과 앎의 구조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했다. 관념론, 인식론, 의식과 무의식등.. 고중세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거칠게 말해 근세는 의지의 시대였다. 근세인들게게 앎은 인간주체의 앎의 한계를 어디까지 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치열한 인식에 있었지, 몸으로 부딪치는 땀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Ⅳ. 현대 : 진리(앎)의 재해석.

현대시대. 근대의 주체철학(데카르트로 시작되는) 혹은 의식철학은 해체철학의 선구자 니체를 통해 이미 19세기에 붕괴의 증조를 드러냈고, 헤겔철학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1,2차 세계대전의 대재앙으로 인해 거의 사망 선고를 받는 위기에 봉착했다. 

'신의 죽음'을 이야기 한 니체에 이어 푸코가 선언한 '인간의 죽음'은 역사라는 '에피스테메'를 창안해 이끌어 온 주체의 죽음에 다름이 아니었다. (푸코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에피스테메라 칭했다.)

신의 죽음,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현대사회는 탈중심의 사회로 표류했다. 이와 같이 주체의 위기 혹은 파산이라는 상황에서 폴 리쾨르(1913-2005)는 근대적 사유의 출발점에 서있는 무너지는 코기토를 창조적,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되살려내려고 하였다. 그의 개척은 전통철학의 철저한 단절도 아니고, 단순한 계승의 반동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속에서 인간 앎에 대립과 갈등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화해시키는데 집중했다. 

그에게 앎은 정의로운 제도안에서,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하여, 좋은 삶을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 타자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역사속에서 타인은 법칙과 원리안에 종속되거나, 추상화되어왔지만, 이제는 타인없이 법칙과 원리는 틀지어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레비나스가 타자를 내면성을 깨드릴 수 있는자, 말을 거는자라고 말했듯, 현대시대에 이르러서는 앎은 고중근세처럼 주어지고, 확보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영향을 받는 상호침투적인 무엇이 되었다. 타자가 배제된 앎은 이제 불의에 가까웠다. 주체는 상대화 되었고, 주객관계의 대상은 주객참여의 대등으로 바꾸었다. 보편성은 개체성으로, 실체성은 관계성으로, 선험성은 체험성으로 설명되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Ⅳ. 나의 자리. 

역사(사상사)를 공부하다보면 시대마다 요청하는 신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대의 오리게네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근대의 슐라이마허등의 변증들은 근거없는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신-인-세계의 관계구조 안에서 신학적으로 변증해야 할 자리가 있었다. 그런의미에서 현대는 현대적 방식을 요구한다. 오늘날의 교회가 주체도 인식되지 않을 고중세의 '신 중심'의 방식으로 이야기 하거나, 주체가 주도권을 가지고 객체를 대상화 해서 바라보는 근대 '인간 중심'의 방식으로 이야기 된다면, 그것은 단연코 시대착오적인 목회가 될 것이다. 

현대는 앎의 인식(참된 것)과 앎의 한계(참으로 알려지는 것)를 넘어 앎의 재정립(참되게 살게 하는 것)을 요구한다. 살게 하는 것에 이르러서 비로서 '체험(살과 피가 닿는 땀의 영역- 몸의 영역)'은 의미를 찾았다. 이성이 앎의 언어라면, 체험은 삶의 언어다. 몸소 겪어서 우러내는 삶의 언어는 주체와 객체를 대상화해서 보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삶의 언어(관계의 언어)안에서 주체와 객체는 서로 교류하고 서로 참여한다. 

세월호 사건은 참사앞에 당황하는 교회의 시대착오적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설교안에서 세월호 참사는 철저히 ‘대상화’ 되거나, 해석의 대상으로, 또는 예화로만 축소되기도 했다. 충분히 응답하지도, 충분히 공감하지도 못했다. 시대는 고통받는 자들을 향해 적극적인 환대와 견실한 사랑이라는 삶의 언어를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네 현실은 삶의 언어를 통해 몸으로 각인된 기억이 없기에 어설픈 공감에 되려 빈약한 현실태를 드러낸 꼴이 되었다. 

앞으로 시대는 몸으로 살아낸 언어를 요구할 것이다.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하여,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요구할 것이다. 몸의 기억은 새로운 화두다. 연대는 말씀을 실천해서 삶에서 체험하는 체화를 통해 그 진정성이 확보될 것이다. 체험의 차원은 뿌리깊은 몸의 언어이다. 모든 사람이 A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몸으로 다른 것을 체험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몸의 언어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앎의 확장의 방식으로 과연 삶의 축소를 행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밀을 알수있을까. 그리스도 십자가의 체험은 삶의 언어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받은 우리는 신의 형상을 품고 있는자이다. 신이 자기비허의 삶으로 자신의 본성을 나타냈다면,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는 지름길은 어쩌면 자기비허의 삶의 겪어냄(살아냄)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앎의 확장의 방식으로 이어질 수 없는 불연속적인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