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한국의 지성운동의 현황과 그 함의

 

 

- 이원석 연구위원

 

1. 서언: 대학의 퇴락頹落과 인문학 열풍

 

대학이 예전 같지 않다. 상아탑으로서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기업체로서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대학이 맛을 잃었다.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그 위치를 감싸고 있던 후광이 사라졌다. 특히 인문학의 경우에는 그 상황이 극단적이다. 졸업하자마자 헐벗은 존재가 되고 만다. 취업 시장과 결혼 시장 모두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되고 만다. 호모 사케르가 따로 없다.[1]

 

하나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하나님은 정녕 인문학을 사랑하시나보다. 대학 안에서의 인문학은 그 위세가 급락急落하는 중인데도, 대학 밖에서의 인문학 열풍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당연히 이 바닥에도 슈퍼스타가 나타나고 있다. 이지성은 고전 탐독으로 천재가 되(어서 성공하)라고 독려하며, 강신주는 자본주의와 싸우기 위해 냉장고를 버리라고 촉구한다.

 

지금은 더 이상 인문학이 학자들과 학생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모두가 공부한다. 홀로 독서하고, 또한 모여서 토론한다. 주부도 모여서 고전을 강독하고(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다시 다루기로 하자), 사장님들도 짬을 내어 교양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 읽고 토론하고 서평 쓰기에서 나아가 내 인생의 첫 책쓰기에 도전한다. 인문교양은 우리 시대의 트렌드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기수인 사장님들이 인문학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2] 우리 사장님들의 독서 취향이 인문 교양으로 방점이 찍히고 있는 추세란다. 우리 사장님들이 교양 강좌에 귀를 기울이고,[3] 심지어 휴가를 떠날 때에도 인문 교양서적을 챙기신다.[4] 무엇보다 서울대와 중앙대가 고위경영지도자 과정에서 인문학을 강조하지 않던가.

 

하지만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제 인문교양 축적을 위한 배움의 장소로 대중이 택하는 곳은 대학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배움의 공동체가 도처에 창궐하고 있다. 이제는 각급 학교에서나 지역 도서관들에서도 인문 공부에 여념이 없지만, 그 전에 수유 너머니 철학아카데미니 다중지성의 정원이니, 대안연구공동체이니 하는 단체들이 멍석을 깔아놓은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공부 모임들은 지금의 인문 열광의 현상 앞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적어도 이들은 그만한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이 공동체들은 바깥을 향해 상당히 매력적인 광채(光彩)를 보여준다.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들고, 그 모임을 모방하고 싶게 만든다. 곧 그들의 존재와 방식이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복음주의가 지성의 스캔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원고에서는 기독교 안팎에서 각기 두어 단체 정도에 국한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함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앞에서 이끌지는 못할망정 뒤처지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는가.

 

2. 세속의 학습 공동체: 대학에서 세속으로

 

먼저 (<레이디 경향>에 따르면) 대한민국 최고의 인문학 연구 공동체라고 하는 수유+너머를 다루기로 하자.[5] 이것은 고미숙, 권보드래 등이 모인 수유 연구실에[6] 서사연(서울사회과학연구소)[7] 멤버이기도 한 고병권, 이진경의 연구공간 너머가 결합되어 화학작용이 일어나서 발생한 집단이다. 이는 고미숙의 제안으로 말미암았다. 그녀가 이 연구공간의 창립자인 셈이다.

 

지금은 남산 강학원,[8] 수유너머문,[9] 수유너머N,[10] 수유너머R[11], 인문팩토리 길(전신이 수유너머 길이다)[12] 등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에서 인물 중심으로 분류하는 것은 썩 추천할 바는 아니지만, 여하간 남산강학원에는 고미숙, 수유너머N에는 이진경, 수유너머R에는 고병권과 박정수 등이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선생 따라 갈린 셈일 지도 모르겠다.

 

또한 2000년에 시작된 철학아카데미가 있다. 철학 대중화 운동을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의 의미가 열리는 길을 모색하였다.[13] 그 취지문에 따르자면, 철학아카데미는 직업으로서, 전공으로서의 철학을 거부하고 살아 있는 사유를 펼치고 있는 젊은 철학자들의 공동체가 되고, 보다 고급한 사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치열하고 폭넓은 사유의 장을 제공하고자 한다

 

철학아카데미 또한 수유 너머와 마찬 가지로 여러 스타들이 넘실대던 곳이다. 대학로에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가 있다면 인사동엔 '철학아카데미'가 있다.[14] 하나 이 또한 둘로 갈리게 되었다. 조광제로 대표되는 통의동에 있는 철학아카데미와[15] 이정우가 이끄는 소운서원(逍雲書院)으로[16] 나뉜다(이제 PAIDEIA로 재편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17]).

대안연(대안연구공동체)[18] 김종락 대표의 분투가 돋보인다. 최근에 이곳의 열성 멤버인 세 명의 아주머니(!)들이 공저로 책을 내기도 했다.[19] 이곳은 여러 단체와 연대하면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일반인들로 구성된 공부 공동체의 구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직장인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나오는[20] 이들이 있을 정도이다.

 

좌파적 지향성을 가진 단체로 다지원(다중지성의 정원)[21] 빼놓을 수는 없겠다. 이들이 지성의 영역에서 주목하는 현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학의 부패와 붕괴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지성 주체들의 등장입니다.[22] 따라서 대학이 [……] 전문지성을 양산한다면 다중지성은 삶의 존재론적 가치를 강조하는 협력적이고 창조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지원은 (안토니오 네그리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또노미아(자율주의) 라인을 따른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천 개의 고원>이 이들의 인식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이들의 정치철학적 기획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곳은 조정환의 리더십 하에 연구와 출판(갈무리)[23]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또한 둘로 분화되었다.

 

이외에도 학습 공동체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곳들만 간단히 짚어보자. 길담서원은[24] 고전[] 소리내어 몸으로 읽는 현대판 서당[] 만들 겠다는 박성준 교수의 목적 하에 탄생하였다.[25] 문학과지성사가 운영하는 문지문화원 사이는[26] 문학ㆍ예술과 인문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한다.[27]

 

2009 9월에 시작한 문탁네트워크는[28] 친구와 함께 공부를 통해 삶의 비전을 찾아가는 작고 단단한 네트워크이다.[29] 누구나 시인이 되고 농부가 되는 곳,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라면서 좌파적 선언을 천명하고 있다.[30] 특별히 하위 범주에 속하는 인문학 공간 문탁은 공부-공동체이고, 일상-공동체이며, 또한 주권없는 학교이기를 꿈꾸고 있다.[31]

 

좌파적이기로는 한형식의 헌신과 지도력에 기대는 바가 적지 않은 세미나 네트워크 세움[32] 또한 만만치 않다. 자본, 국가, 미디어가 독점하고 있는 지식과 그것의 생산 및 유통의 경로를 대중들 스스로 영위하기 위한 장이며,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지식을 대중이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고, 나누는 곳이고자 한다.[33] 

 

아트앤스터디는[34] 지젝의 국내 초청에 기여한 바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35] 인문학협동조합은[36] 20~30대 인문학 연구자의 존립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37] 반면 “‘자기-교육 운동, 해방의 인문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38] 자유인문캠프는[39] 학생들이 주도한다. 도대체 배후가 어디예요?라는 질문에 그런 거 없다.라고 공식적으로 답한다.[40]

 

참여연대 부설 조직인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는[41] 참여사회아카데미를 뒤잇는 진보·인문·행복의 배움터(이기를 꿈꾸는 시민교육의 장)이다.[42] 앎의 즐거움, 모든 변화의 첫 걸음입니다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도서출판 푸른역사가 운영하는 푸른 역사 아카데미는[43] 제도 밖에서 역사의 미래를 찾다라는 표제 하에 역사 대중화를 선도하고자 한다.

 

또한 종합 인문주의 정치 비평지를 표방하는 격월간지 <말과활>  궤를 같이 하는 학습공동체 가장자리는[44]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만남과 우정, 상호 학습의 공동체이기를 꿈꾸며, 함께-지각함을 통한 길찾기, 학습공동체이고자 한다.[45] 이 외에도 더 많은 곳들을 소개할 수 있겠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리라고 본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많은 경우에 배움의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홀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모여 하는 공부를 지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과거 3의 성(<공부하는 엄마>, 7)으로 분류되기도 하던 아줌마(!), 즉 주부가 중심에 들어서게 된다(수유+너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서는 4절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다른 하나는 배움의 실용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양의 원래 의미에 새롭게 근접해가고 있는 셈이다. 교양(liberal arts)을 가리키는 라틴어(artes liberales)는 계급적 함의를 담고 있다.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인 폴리스의 시민이면 알아야 하는 지식과 기예를 가리킨다. 애초에 인문 교양은 무목적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결과적으로 배움과 놀이를 뒤섞어 버리게 된다. 고미숙은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휴머니스트, 2004)에서 수유+너머에 대해 지식과 일상이 하나로 중첩되고, 일상이 다시 축제가 되는 기묘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12) 말한다. 우리는 그녀가 자신이 소속된 연구공간을 소개하는 방식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책에 대해선 다시 다루기로 하다).

 

또한 고미숙의 꿈은 심포지엄을 축제로 만드는(220) 것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지식의 기쁨(221)을 회복하라고 촉구한다. 지식의 기쁨이 상실된 이유를 지식이 삶으로부터(221) 유리된 데에 따른 것으로 본다. 이렇듯 대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참된 앎의 기쁨이 함께 모여서 읽고 먹고 마시는 공동체와 더불어 공유하는 삶(의 기쁨) 속에서 충족된다는 것이다.[46]

 

 

3. 기독교 학습 공동체: 한줌의 복음주의와 지성의 제자도

 

기독교 안에서도 일군의 학습 공동체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주로 인력과 한줌의 복음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기독청년아카데미,[47] 현대기독연구원,[48] 기독인문학연구원,[49] 연구집단 카이로스,[50] 청어람 아카데미,[51] 인문학과 성서를 사랑하는 모임,[52] 기독연구원 느헤미야,[53] IVF 복음주의 연구소,[54] 일상생활사역연구소[55], 케리그마 신학연구원[56] 등을 들 수 있겠다.[57]

 

우선 청년성서연구원을 전신으로 하는 기청아(기독청년아카데미)는 공동체적 기반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곳이다. 특히 양진일 목사가 있는 가향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 기독청년학생 지도력 양성과 지원을 위해 세운 기독청년학생 지도력 양성 기관입니다.이라고 확언하는 가운데 자생적 연구-실천 공동체를 생성해가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58]

 

김동춘 교수가 대표로 있는 현대기독연구원은 현대기독교아카데미를 전신으로 한다(2004 1월에 기독교사회책임연구소로 시작하여 곧 현기아로 개칭한 것이며, 2012년에 다시 현기연으로 개명하였다). 현기아 당시 상설 교육과정인 사제학(사회적 제자도 학교)을 통해 제자도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교회의 인식 개선에 기여한 바가 크다.

 

기독인문학연구원(기문연)인문학과 기독인문학의 대중화를 통해 한국 사회와 교회의 인문학적 교양의 함양과 지성적 성숙에 기여하고자 설립된 연구교육단체이다.[59] 연구(기독인문학연구지원사업), 강의(기독인문학아카데미)에 더불어 사회적 기업(인문학아카데미)을 표방한다. 원래 현대기독교연구원의 산하 조직으로 2012 6월에 설립되어 그해 12월에 분립한 것이다.

 

연구집단 카이로스(CAIROS)는 대학원생들이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다. 이들 멤버 중 상당수가 <복음과상황>의 독자모임인 (중의적으로 작성된)[60] 좌변기[61] 출신이었다. 물론 그 멤버십 면에서나 정체성 면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지만, 청년 특유의 생기발랄함과 더불어 여러 콘텐츠를 통해서 국내파로서의 독창적인 연구 역량을 보여주었다.

 

청어람 아카데미는 높은뜻숭의교회의 교육관 청어람에서 2005년에 시작하였다.[62] 이곳에서 행한 많은 것들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의ㅡ 초기 공동기획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복음과상황의 편집장을 역임한 양희송 현 대표의 리더십 하에서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이른 시기에 세련된 콘텐츠와 유연한 접근성을 보여주었다.

 

인성모(인문학과 성서를 사랑하는 모임)[63] 대체로 대학 강사나 젊은 교수들이 참여하여 만든 연구 단체이다. 비교적 젊은 리더십이 주도하는 세 공동체인 청어람아카데미와 카이로스, 인문학과 성서를 사랑하는 모임 등이 힘을 합쳐 연구공간 공명이라는 거점을 마련한 적도 있다.[64] 명동에 둥지를 틀었던 이 공간과 그곳에서의 활동은 일반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다.[65]

 

2009년에 시작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하나님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을 추구하며, 이로 인해 학문의 전통적인 삼대 기능(연구, 교육, 사회적 기여)을 지향한다.[66] 신학 연구과정과 기독교학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신학교의 교육 수준에 비추어 보아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다. 복음주의 진영의 많은 학자들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강일 목사가 이끌고 있는 IVF 복음주의 연구소는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의 정체성, 현황, 전망 등을 한자리에서 연구하고 섬기고자 하는 취지로 모였, IVF를 넘어서 모든 복음주의 운동의 네트웍이 되겠다는 겸손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지성근 목사가 주도하는 일상생활사역연구소는 일상생활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요 사역(service)이라고[67] 천명한다.

 

케리그마신학연구원은 한국 칼 바르트 학회가 주최하고, 신촌성결교회가 후원하는 교육 기관이다. 김재진 전 계명대 교수에 의해서 현장 목회가 필요로 하는 유익한 신학적 자료와 근거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68]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의 73개 명제 세미나나 본회퍼 세미나 등 현대 신학에 대한 이해를 열어주는 방향으로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줌의 복음주의가 지금까지 소개한 연구와 교육 모임을 만들어냈다. 복음주의의 지적 역량이 한국 교회의 수준을 어느 정도 끌어올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게다. 실은 개독교라 통칭되는 한국교회가 품지 못 한 기독 교양인들, 혹은 그와 동시에 이러한 근본주의 기독교를 용납할 수 없는 기독 교양인들의 다수가 복음주의로 수렴된 것이기도 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달리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 안의 연구 및 교육 집단의 활동이 찻잔 속의 태풍과 같은 측면 또한 있다는 거다. 이들이 얻는 반향(反響)이 한줌의 복음주의 안에 머무르고 마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앞서 세속의 학습 공동체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바로 이점을 필자는 다음 절에서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4. 학습 공동체의 형성과 성숙을 향하여

 

4.1. 수유+너머와 공동체 형성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적어도 초기의 재정과 리더십 발휘의 측면에서 보면, 수유 너머 공동체의 활성화는 고미숙에 기댄 바가 크다. 고미숙은 정확히 십년 전에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휴머니스트, 2004)라는 간증집(?)을 통해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소개하고, 자랑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법 불편하게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앞서(2절 후반부) 고미숙이 언급한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매력을 일부 소개하였다. 하지만 그 전제는 무엇인가? 공동체의 형성에 있다. 실은 이게 바로 그 당시 수유+너머와 함께 양대 산맥으로 이해되던 철학아카데미와 구별되는 지점이었다. 철학아카데미가 갖추지 못한, 그리고 이후에 소운서원에서 만들어보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 공동체 만들기다.

 

수유+너머에게 있어서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아까 함께 모여서 읽고 먹고 마시는 공동체와 더불어 공유하는 삶이라는 표현을 통해 암시한 바와 같이 식사를 함께 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밥이 신성해서가 아니다. 매일 주기적으로 함께 식사하고, 이를 위해 돌아가며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분담하는, 즉 삶의 공유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유에서 대학로로 옮겨올 때에서야 마침내 연구 공간 안에서 비로소 점심, 저녁 두 끼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77-8). 식탁 겸 세미나 테이블로 쓰게 되는 탁구대를 마련함과 아울러서 마침내 밥상뿐 아니라 운동까지 해결되었다(78). (대학로에서는 중요한 덕목인) 비용 절감에 더해 위에서 말한 삶의 공유가 이루어진 것이다.

 

저희가 저희를 규정하기 힘든 법이지요. 외국에서 이 곳을 찾아오는 지식인들이 많은데 그분들을 통해 우리 특징을 알게 되어요. 외국에서는 공동체나 사회단체가 많이 있는데 학습과 생활을 함께 하는 곳은 없답니다. 영성공동체 하면 영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이지요. 생활을 전면적으로 함께 하면서 지식을 생산하는 곳은 별로 없어요. 우리 <수유+너머>라는 공동체의 기반이 지식 생산입니다. 외국인들이 이것을 모두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외국인의 거울을 통하여 거꾸로 우리를 봅니다. 공동체는 있는데 공부하는 곳은 없고, 연구소는 많은데 생활하는 곳은 없습니다. 밥 같이 해먹고 카페 운영하는 그런 연구집단은 없는 것이지요.[69]

 

수유+너머의 고유한 특징에 대한 고미숙의 간명한 설명이다. 그러니까 연구를 공동으로 할 뿐만 아니라 생활도 공동으로 한다. 최소한 두끼는 여기서 먹는다. 차 마시고 뒤풀이하는 곳도 여기이고 외부사람 만나는 곳도 여기이다. 생활의 70-80%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수유+공간> [……] 생활과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70]

 

물론 모든 구성원이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 일주일에 한번 두 번 세미나를 참석하는 분들도 수백명이 있어요. 그러나 그 분들은 외곽에 있어요. [……] 그러나 실제 수유공간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100% 여기에서 삽니다. 공부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지식을 생산하지요. 여기서 밥도 하고 카페도 운영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회의도 해야 합니다.[71]

 

물론 수유+너머가 조금 유별나기는 하다. 하지만 단지 교육만 수행하지 않고, 연구+교육을 병향하는 거의 모든 공동체들이 어느 정도로 삶을 공유하고 있다. 이른바 선생들끼리 공유하는 삶을 넘어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드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서로의 삶을 배우고 따른다. 함께 먹고 함께 읽는다. 함께 웃고 함께 논다.

 

우리가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간단한 거다. 함께 하는 것이다. 반드시 모든 삶을 공유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기적으로 회집하는 시간과 공간을 늘려야 한다. 물리적 현존으로 함께 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SNS 등을 통한) 온라인 교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하지만 역시 무엇보다 삶을 함께 하고 시간을 더불어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유+너머 안에서 살다시피 하는 이들이 많다. 그 경우에 드는 비용이 바깥세상에서보다 훨씬 적게 들어간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밥값과 찻값이 모두 저렴하다. 자기 책이 없다면 연구공간에 비치된 책을 봐도 된다. 주거문제도 그렇다. 인근에 공간을 얻어 더불어 모여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부부조차도!

 

더욱이 여기에서 열심을 다해 공부하면,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강의와 집필의 기회가 열린다. 그 수입이 많지 않더라도 이곳에서는 생계를 꾸려갈 수가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결국 먹고 사는 문제가 공동체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보다 더 낫지 않는가? 틸리히는 이를 가리켜 잠재적 교회(latent church)라고 불렀을 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복음주의 지성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지극히 옳으신 말씀이지 않나? 더욱이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교회론적 인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점이 제대로 실행되었나를 자문해보면, 아마 긍정적인 답변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게다.

 

마음은 몸과 공간에 직결되어 있다. 공동체 형성을 위해 안정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또한 그 공간 안에서의 지속적 교제를 독려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해야 한다.[72] 연구실과 도서관, 강의실과 식당이 구비된 공간을 준비하고, 무료나 저가로 제공한다고 생각해보라. 역량 있는 소장 연구자들을 당장 그곳으로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간 마련에는 경제적 부담이 문제가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한국 복음주의의 지성의 스캔들을 돌파할 수 있도록 중대형 교회나 혹은 교계의 독지가(篤志家)들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후에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불리게 된 사회조사 연구소가 존립할 수 있던 이유는 펠릭스 베일의 쾌척(快擲)에 있었다. 나눌 수 있는 것으로 나누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공간 마련과 그 유지를 위해 누군가 희생하는 구조가 그동안 지배적이었다. 가령 새움은 한형식, 초기의 수유+너머는 고미숙과 이진경이 헌신했다. 철학아카데미도 운영위원들의 희생이 뒤따랐다고 들었다. 기독교 지성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그러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지성의 제자도를 실현하고, 한국 사회를 새롭게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짐을 나눠져야 한다.

 

이에 더불어 연구 집단의 수익 모델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협동조합은 소장 인문학자들의 존립 근거를 모색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가장자리는 출자금과 조합운영비를 납부하는 조합원을 계속 모집하고 있다. 다지원은 갈무리 출판사를 운영하고, 출판 작업에 함께 한다. 또한 기독인문학연구원은 사회적 기업인 인문학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우리의 경우에는 지역 교회와의 연대를 고민해야 한다. 이제 지역 교회는 교육적 기능을 이러한 연구공간에 위임할 것을 고려해봐야 한다. 물론 앞서 말한 공간의 마련과 유지를 포함한 일정한 후원의 반대급부로서 또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에서 더 나아가 교인의 성숙과 사회적 기여를 위해서라도 이러한 연구공간과 지역교회가 연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4.2. 대안연과 아줌마

 

연구공간과 지역교회의 연대를 우리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좋은 모델이 거의 없다. 이는 대학과 사회 간에 균열이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게다. 지역교회나 지역사회나 동일하게 연구자들에게는 두터운 벽으로 가로막혀있는 상황이다. 그 벽 너머로 나아가야하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깐 최근 연구집단과 아줌마의 연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수유너머R 연구원은 말한다. 오전 시간대는 80~90%가 주부들이에요. 오후 시간대는 아무래도 시간이 자유로운 분들이 많고요. 백수부터 프리랜서, 자영업자까지요(웃음). 그리고 밤 시간대는 직장인들이죠. 시간대별로 세미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확연하게 달라요. 특히 주부 강좌 회원님들이 많이 증가했어요.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 또한 놀라울 정도라니까요.[73]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대안연(대안연구공동체)에서는 주부 회원 세 사람이 책을 펴냈다. 이 책의 부제는 인문학 초보 주부를 위한 공부 길잡이이지만,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아니, 실은 그냥 봐도 한 눈에 드러나듯이) 대안연을 만난 주부의 지적 회심기라고 할 만 하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엄마>는 대안연을 자랑하고, 대안연으로 인해 바뀐 자신을 간증하는 책이다.

 

이분들에게 책을 쓰시라고 등을 떠민(<공부하는 엄마>, 14) 김종락 대안연 대표는 대안연의 공부 멤버를 셋으로 나눈다(<공부하는 엄마>, 8-9). 학생, 직장인, 주부. 무엇보다 낮에 진행하는 공부 모임의 참여자 대부분은 여성입니다. [……] 낮 시간에 공동체를 찾는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이는 역시 주부입니다.(<공부하는 엄마>, 6-7)

 

내가 지금 이를 주목하는 것은 복음주의 지성 운동에 주부를 끼워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회와의 연대를 더욱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뜻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엄마>의 작가들은 모두 사십대에 접어든 중년의 아줌마이다. 그들의 자아실현의 길목에 대안연이 나타난 것이다. 대안연은 그들의 열정을 수용하고, 삶의 의미를 제공했다.

 

기독 지성인들은 자신의 전공을 세상의 언어로 번역해야 할뿐더러 교회의 언어로도 번역해야하다. 또한 교회 구성원의 정체성을 성찰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당장 지역교회의 여집사님들과의 소통을 고민해야 한다. 그분들의 고민과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이는 물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아가 교회와 사회의 가교를 놓기 위해서라도 기독 지성 공동체가 져야할 짐이 크고 무겁다. 하지만 지금 많은 연구자들은 오늘 벌어 오늘 살아가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들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온전히 발휘하도록 지역교회는 기독 연구집단을 아낌없이 후원해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 이들은 지역교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나설 수가 있다.

 

5. 결어: 교회와 함께 걷자!

 

한국의 기독 지성운동은 20세기 후반의 마지막 십여 년 동안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가지고 고민하였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모색한 기간은 이제 겨우 십여 년 남짓 하다. 결코 길다고 할 수는 없는 시간이다. 앞으로의 상황을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이 바람처럼 불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나 적어도 그 바람이 스치는 것은 알고 있다. 최소한 우리는 지금 복음주의를 중심으로 기독 지성운동의 새로운 바람을 느끼고 있다. 내일의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회개)나 영성(기도)의 회복보다 외려 교양의 회복에 있다고 믿는다.

 

한국교회에는 느헤미야가 필요하다. 세상 속에서 다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줄 학사가 필요하다. 세상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줄 학사가 필요하다. 세상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교회로 하여금 현재의 삶의 자리 한 가운데에서 성경을 바로 직면하게 도와줄 학사가 필요하다. 이사야의 기도를 기억하며, 이 글을 닫고자 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1] 그렇다. 인문학 연구자는 우리 시대의 잉여가 되었다. 인문학의 본령은 그 쓸모없음에 있기에 모든 것의 시장화를 모색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지 않은 탓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시장(이 되어버린 사회)을 향해 인문학의 유용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2] 다음과 같이 노골적인 제목의 책이 나오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현숙, <사장의 인문학>(팬덤북스, 2013).

[3] 제조업 사장님들 '열공모드'성서산단 인문학 강좌 호응, <매일신문> 2014 3 14일자.

[4] '휴가 떠나는 사장님 가방엔 무슨 책이?'올해 인문·교양 강세, <조선비즈> 2014 7 7일자.

[5] [주부를 위한 인문학 강의 탐방] 대한민국 최고의 인문학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 <레이디 경향> 2012 11월호.

[6] 여기에서 행한 최초의 세미나는 고미숙이 권보드래와 함께 조직한 <대한매일신보> 강독 세미나였다. 이는 수유+너머의 연구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7] 서사연은 김진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주도하였기에 이곳에는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들이 많았다.

[12] 2011년 중반까지의 자료는 http://www.transs.pe.kr/road에 있지만, 그 이후로는 사이트 주소를 옮겼다. http://www.roadfactory.kr 현재는 서비스 기간이 만료되어 자료를 볼 수가 없고, 현재는 페이스북에 둥지를 튼 걸로 보인다.

[13] http://www.acaphilo.or.kr/xe/acaphilo_1 이들의 구호는 "열린 사유의 공간, 사유를 열어가는 광장"이다.

[14] [이색 기획] 틈새 학문 공략하는 재야 고수 列傳, <신동아> 526 2003 7 1.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3/06/25/200306250500008/200306250500008_7.html

[16] 서원의 이름인 소운(逍雲)은 이정우 교수 자신의 호이다. http://www.sowoon.org 고명섭 한겨레 기자는 개원 당시에 소운서원을 취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부와 연구에 전념하는 학자 공동체라는 점에서만 옛 서원을 닮았다. “‘아카데미에서 서원으로 우리시대 철학의 집 짓다, <한겨레> 2007 3 15일자.

[17] 파이데이아는 아래에서 다룰 대안연(대안연구공동체)과 하나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8] http://cafe.naver.com/paideia21

[19] 김혜은; 홍미영; 강은미, <공부하는 엄마>(유유, 2014). 김종락 대안연 대표가 쓴 머리말의 제목은 그 자체로 음미해볼 만 하다. 엄마가 공부하면 가정이 변화하고 세상이 바뀝니다.(5)

[20] 김종락, 머리말 - 엄마가 공부하면 가정이 변화하고 세상이 바뀝니다, <공부하는 엄마>, 5.

[22] 이것과 이어지는 문장은 그들의 취지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http://daziwon.net/intro/56007 거기에는 왜 학교 혹은 학원이 아니라, 정원인 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현재의 교육기관이 수행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전혀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곳을 우리는 정원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들뢰즈의 느낌이 물씬 나지 않는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국지적, 우발적, 특이적 투쟁들이 연결지점을 찾으면서 제3의 투쟁으로 변신해 나가는 생성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결연한 해명을 살펴봐도 그러하다.

[25] 고전 소리내어 몸으로 읽는 현대판 서당 만들 것, <경향신문> 2008 2 18일자.

[30]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가져온 다음의 인용문을 참고하라.

    노동이 분화되자 각 개인은 하나의 일정한 배타적 영역을 갖게 되고, 이 영역이 그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한 사람의 사냥꾼, 한 사람의 양치기, 한 사람의 어부 혹은 한 사람의 비평가이며, 그가 그의 생계 수단을 잃지 않고자 하는 한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이에 반하여 아무도 배타적 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그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스스로를 도야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냥꾼, 어부, 양치기, 혹은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곧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밤에는 비판을 할 수 있게 된다. 국역본(김대웅 역, <독일 이데올로기 1>, 두레, 1989)으로는 75쪽이다.

[33] 다음의 새움 취지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http://seumnet.com/intro

[35] 마인드브릿지-아트 앤 스터디,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하는 인문학 콘서트 참가신청 접수 개시, <스와이어> 2012 6 7일자. 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629353

[37] 대학서 쫓겨나는 인문사회과학, 협동조합에 둥지 튼다, <한겨레> 2013 4 2일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80942.html

[40] 요즘 대학생들은 자신을 비롯해 또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언명은 되새겨봄직 하다. 이들의 자율성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46] 고미숙은 특별히 화요토론회가 지닌 특유의 생동감을 자랑한다. 그녀에 따르면, 우린[수유+너머 구성원들은] 정말 신명나게 듣고, 열나게 토론한다.(224)

[57] 필자의 무지로 인해 누락된 곳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58] 이는 기독청년아카데미 운영위원장인 최철호 목사가 작성한 다음의 소개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http://club.cyworld.com/51204654112/901781

[59] http://cafe.daum.net/ioch/S7Qg/1 고재백 기문연 대표의 인터뷰도 참고하길 바란다. [인터뷰-기독 인문학 강좌 진행 고재백 기문연 대표] 기독인들 지성위해 인문학 필요, <국민일보> 2013 1 22일자.

http://m.missionlife.co.kr/view.asp?arcid=0006828177&code=23111111

[60] 정정훈은 좌변기 관련 공고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좌파적 변혁의 기미', '좌파, 변혁, 기독인', '좌절, 변절, 기회주의','좌파 변절자들의 기회주의적모임' 등등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진 열린 기표로서 '좌변기'라고 하기로 하였습니다. http://club.cyworld.com/50070612166/86629152

[65] 신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사유의 공간', <한국일보> 2010 7 29일자.

[66] 느헤미야의 3대 사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교육세상과 소통하는 연구, 그리고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 등이다. http://www.nics.or.kr/vision

[69] 이는 다음 자료에서 인용한 고미숙의 설명이다. [박원순의 희망탐사 131] 학습과 삶이 일치하는 코뮨, <코뮤넷 수유너머>, <원순닷컴> 2009 12 3, http://old.wonsoon.com/969

[70] Ibid.

[71] Ibid.

[72] 에스더 M. 스텐버그의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더퀘스트, 2013)를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바로 활용하기는 어렵겠지만, 공간심리학에 대한 초보적 인식은 필요하다고 본다.

[73] [주부를 위한 인문학 강의 탐방] 대한민국 최고의 인문학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 <레이디 경향> 2012 11월호.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11&artid=201211141128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