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로맨스와 창조과학 논쟁. 아무리 뜯어봐도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이 둘을 엮어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낸 놀라운 책이 있으니, 바로 러스트(김민석) 작가의 『창조론 연대기』(새물결플러스, 2017)다.
러스트 작가로 말할 것 같으면, 조대현, 김영하 등의 1세대 기독교 만화가들을 이어 기독교 웹툰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하면서 데뷔작인 『교회를 부탁해』(새물결플러스, 2018)를 비롯해 『마가복음 뒷조사』(새물결플러스, 2016) 등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바 있다. 게다가 아내인 린든 작가 역시 『비혼주의자 마리아』(IVP, 출간 예정)로 누적 조회수 100만 회라는 위업을 달성해 낸 만큼, 기독교 콘텐츠 역사상 유례없는 부부 기독교 웹툰 작가로서 준수한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하겠다.
러스트 작가의 미덕은 작품이 다루는 소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그리고 그 내용들을 가볍고 명랑한 서사들에 자연스레 녹여내는 점이다. 그의 대표작인 뒷조사 시리즈 역시 그렇듯, 『창조론 연대기』 역시 창조과학 논쟁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풋풋한 하이틴 로맨스라는, 어쩌면 조금 뜬금없는 장르의 이야기에 녹여낸다.
『창조론 연대기』는 창조론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길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수영과 준은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야기된 갈등과 혼란을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모둠 토론 과제를 계기로 함께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의 접점들을 찾아나간다. 창조론에 얽힌 다양한 견해들을 접하면서, 창조과학의 입장에서 현대 과학을 비판하던 준은 마침내 자신만의 신앙의 길들을 찾아나간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수영과 준 사이의 갈등은 ‘일반적인’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갈등의 양상들을 잘 드러낸다. 성경과 과학이 배치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 창조과학의 존재를 알고 나서 얻게 되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에 기반한 방어행동으로서의 정죄는 작금의 한국 교회가 과학이라는 주제를 취급하는 방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갈등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과학과 배치된다는, 과학과 신앙의 전쟁이라는 이분법 구도가 일종의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 이 환상으로부터의 탈출은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성경 해석의 지평을 열어준다. 독자들은 마침내 창조과학을 지지해주었던 ‘문자 겉보기 해석’을 벗어나, 성경 본연의 의도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해석의 단서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창조론 연대기』는 단순히 창조론에 대한 여러 시각을 소개하는 책일 뿐 아니라 신앙인들이 자신이 고수하던 성경읽기, 성경해석의 방법을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극단이 아닌 제3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요즘, 과학과 신앙이라는 해묵은 대립 속에서 갈피를 잃었다면, 혹은 문자적 성경읽기에 피로감을 느낀다면 『창조론 연대기』를 읽어보자. 간질간질하고 유쾌한 로맨스 속에 숨겨진 깊이들 속에서 신앙의 새로운 길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영명 / 복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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