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특집! 복연, 고전을 이야기하다! - 월터스토프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IVP, 2007.
IVP 모던클래식스 시리즈에는 그야말로 ‘주옥 같은’ 기독교 고전들이 많지만 많은 사람들이 섣불리 손에 집어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던클래식스가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서 복연도 오랜만에 책장에 잠자고 있던 책을 꺼내보았습니다. 복연이 고른 책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입니다. 월터스토프가 이 책을 쓴 때는 아직 소련이 건재하던 1981년이고 한국에 번역된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쉼 없이 터져 나오고 있는 2018년 연말 한국에서 읽기에 이만한 책도 없을 것입니다.
책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면 더 역동적인 고전 읽기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종래의 서평을 살짝 바꾼 북토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성탄 분위기가 무르익던 12월 어느날, 복연의 두 연구원 은영과 영명이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눈 책수다를 연말특집으로 전해드립니다.
고전? 클래식? IVP모던클래식스!
영명: 오늘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저는 사실 IVP 책들을 단권으로는 알았지만, IVP 모던클래식스 시리즈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는데요. 이 시리즈에 대한 소개를 좀 해주시지요.
은영: IVP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근대 이후 기독교의 고전들을 꾸준히 출판해오고 있습니다. IVP 모던클래식스는 내용이 조금은 무겁지만, 기독교인들이 삶에서 마주치는 신학, 사회학, 문화나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담은 고전들의 시리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시리즈의 1권은 두껍기로 유명한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데,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에 대한 존 스토트의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지요. 특히 대학생 때 IVF를 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지만 사실상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책이지요. 그만큼 IVP모던클래식스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텐데’ 생각은 하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그야말로 ‘고전’입니다. 그래서 복연이 특별히 모던클래식스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선뜻 다가서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렇게 서평이 아닌 책수다로 준비했습니다. 이번에 성공하면, 다른 모던클래식스 책들도 1년에 한두 편씩 해봐도 좋을 것 같고요.
영명: 원래 클래식이란 게 어려워보이고 낯설어보이고 그렇죠.
은영: 꽂아두는 게 가장 멋있지요.
영명: 전질로 사두는 게 최고죠.
은영: 문제는 IVP모던클래식스는 지금도 1년에 몇 권씩 나오기 때문에 전질을 구매하는 게 쉽지가 않다는 거죠.
은영: 그 많은 모던클래식스 중에서도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는 무려 003권이네요!
영명: 그러면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로 들어가보죠. 이 책이 나온 것이 1981년이네요.
은영: 거의 40년이 된 책이군요.
영명: IVP에서 이 책이 나온 시기는 2007년이고요. 11년이 되었군요.
은영: 이 책은 클래식스 세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1권이 신학을 다룬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2권이 예술 특히 문학을 다룬 『창조자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3권이 어찌 보면 가장 첨예한 논쟁이 오가는 사회참여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을 낸 셈인데요. 복음의 통전성을 중시하는 복음주의 신학의 지향을 잘 보여주는 기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의미가 큰 책이니만큼, 기독교인들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등한 세계체제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
영명: 말씀하신 대로 사회참여라는 주제를 큰 틀에서 다루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책입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 압제받는 자들, 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은영: 우선 이 책은 놀랍게도 신학자가 세계의 경제구조를 분석하며 책을 시작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결국 근대세계가 만들어놓은 경제체제와 그것이 만들어놓은 불평등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성경에 비추어 논증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 부분부터 말해보자면, 1장에서는 기독교의 역사 중에서 사회참여를 하게 된 신학적‧사회적 전통을 서술하고 있고, 2장에서는 근대 세계의 경제체제라는 어마어마한 주제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영명: 특히 1장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세계형성적 기독교’입니다. 'World Forming Christianity.' 이 개념을 말하면서 월터스토프는 자신을 개혁주의자로 규정하며 논의를 전개하고 있잖아요. 저자는 개혁주의 혹은 칼뱅주의의 초기 모습은 세계형성적 기독교였다고 규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계형성적 기독교라는 개념은 월터스토프의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뒷부분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좀 특이했습니다.
은영: 하지만 이 개념이 없다면 이 책의 논의를 이끌어나갈 수 없는 중요한 기반이지요.
영명: 스포일러를 방지하는 수준에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세계형성적 기독교/종교’란 개념은 세계를 바꾸어나가는 종교를 뜻합니다. 이는 스스로의 가치체계나 신앙체계를 바탕으로 그것이 지향하는 세계, 즉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로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추구하는 기독교를 말하죠.
은영: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통전성’ 또는 ‘복음의 양날개’를 중시하는 참여적 기독교가 칼뱅주의 전통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죠. 특히 1장에서는 이 사회참여가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소명’으로 제시됨으로써 이후 논의를 위한 기반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명: 월터스토프는 세계형성적 기독교를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이 자기자신을 어떻게 사회에 끼워넣을 것인가, 즉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반대급부로는 ‘회피적 종교’를 말하는데, 굳이 저희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수 있는 용어일 것 같네요.
은영: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끼워넣어져야 할’ 세계는 어떤 곳일까. 월터스토프는 2장에서 근대화론과 세계체제론이라는 각각도 어마어마한 두 개의 이론을 동시에 소개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이론을 다 다루는 것은 우리에게도 독자 분들께도 너무 가혹한 일이 될 것이고요. 월터스토프는 근대화론보다는 세계체제론을 옹호하는 입장이니, 세계체제론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세계체제론에 대해서는 김영명 연구원이 공부하신 적이 있으니, 간단히 설명해주시지요.
영명: 세계체제론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주창한 이론입니다. 월러스틴은 전 세계가 세계경제라는 거대한 규모의 체제 속에 포함되어있다고 봅니다. 특히 세계경제 안에 있는 사회단위들을 중심부‧주변부‧반주변부로 구분하는데요. 세계경제가 돌아가는 가운데 주변부는 계속해서 소외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핵심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체제론은 독자를 화나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은영: 저희 연구실에도 지금 꽂혀있는데 무려 네 권이네요. 글씨도 아주…….
영명: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은영: 하지만 월러스틴은 이 책을 이해하기 쉽게 한 장에 깔끔하게 정리해두었네요.
냉전 속에서 샬롬을 꿈꾸기
은영: 월터스토프가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소련이 아직 건재했던 1980년대 초반입니다. 우리에게 소련은 먼 전설 같은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엄연히 양 강대국 중 하나로서 세계 헤게모니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지요.
영명: 월터스토프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가져온 이유는 결국 세계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이기 시작하면서 굉장히 거대한 규모에서의 착취가 일어나고 있음을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이 있죠. 그 책과 비슷한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월터스토프는 세계체제론을 가지고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격차는 사실 근대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발전과 미개발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부의 착취로 인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빈곤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체제의 변혁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의 회피적인 종교의 성격으로부터 돌아서서 다시 한 번 세계형성적 종교로서의 면모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월터스토프의 주장인 셈입니다.
은영: 네. 그래서 3장부터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이루어진 세계체제의 폐해를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영명: 저자는 특별히 이런 문제를 단순히 세계구조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샬롬을 누리고 있지 못한 상태’로 보고 있습니다. 월터스토프는 샬롬의 세 가지 전제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누리는 것으로서, 여기에 대해서는 현재 한국 기독교인의 대다수도 동의할 겁니다. 두 번째는 인간과 바른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때 내 주변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갇힌 자에게 놓임을 누리겠다고 하신 말씀처럼, 인간과 인간이 착취적 관계에 머물러있지 않고 평등하고 자유롭고 동등한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 인간 간의 올바른 관계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세 번째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까지. 이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것이 ‘샬롬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체제는 샬롬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현대인들은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것이죠.
은영: 샬롬을 말하면서 해야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6장의 제목을 보면 좀 뜬급없이 ‘기쁨의 도시’ 이미지가 나옵니다. 처음에 이걸 보면서 저는 좀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어요. 월터스토프는 샬롬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선한 삶과 행복을 말하는데요. 그런데 이는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영적 성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셨고 아름다움을 즐기시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저자는 이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세계를 회복하는 비전을 ‘6장 기쁨의 도시; 샬롬과 도시의 미학’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명: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는 크고 이상적인 담론이었는데요. 그래서 어쩌면 독자 분들은 ‘그거 다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물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월터스토프는 이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회피성 종교에 가까워진, 혹은 개인화된 현대기독교에서는 많은 경우 ‘우리가 잘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반대 입장인듯 하지요.
은영: 하지만 월터스토프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을 책 곳곳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명으로서의 세계변혁을 말하지만 7장 한 장을 할애하여 예배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일, 소명, 세계변혁 등을 행함에 있어서도 예배는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며 그것들과 예배의 관계에 대해서도 논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실천뿐만 아니라 학문이나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이를 실천에 적용해야 할 필요성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명: 이렇게 책 내용을 대략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결론적으로 월토스토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마디로 한다면 아무래도 체제변혁이 아닐까 싶습니다. 굉장히 ‘빨갱이’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말이죠.
은영: 그렇게 말하면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죠? 나는 예배도 강조했고 사랑도 강조했다고 할 텐데
영명: 그럼에도 분명한 어조로 체제변혁을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개혁주의 전통을 지향한다는 사람들조차도 빈곤의 문제는 나눔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왔으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근본적인 변혁이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월토스토프는 제도와 정치, 체제의 변혁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근데 사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대안은 부족하다는 느낌은 들지요.
은영: 근데 원래 고전은 그런 거 아닌가요? (웃음)
영명: 그렇죠. 고전은 그런 거죠. 사실 지금 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83년 당시, 아직 아파르트헤이트가 개혁주의자들의 논리 속에 강고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던 세계에서는 굉장히 새로운 담론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에게 딴지 걸기
은영: 그런 큰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한계도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지요?
영명: 원래 우리는 쓰기엔 아마추어지만 읽기에는 프로라고, 한계하면 또 말이 많아지죠. 먼저 말씀해주시죠.
은영: 저는 이 책이 1세계가 3세계를 빈곤에 빠트린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자에게서 1세계의 백인 남성의 시각은 어쩔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영명: 그렇습니다. 저는 1세계적 한계로 가장 치명적으로 다가온 부분이 해방신학 관련 내용이었는데요. 저자는 해방신학에 대한 설명에서 해방신학의 한계를 규정할 때, 해방신학은 자유 너머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했다고 정리합니다.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이나 긍휼 같은 해방신학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해방신학의 학문적‧논리적 한계를 지적하는데, 그의 비판지점이 걸렸습니다. 자유가 없는 남미 사람들에게 자유 너머를 보는 학문적 여유가 있었을까?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오히려 저자에게 다시 묻고 싶었습니다. 특히 해방신학은 ‘신학’보다는 ‘해방’에 방점이 찍혀있는 실천학문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시대적 맥락을 빼고 평가를 내린다면, 그저 어떤 의의와 한계가 있는 학문사조의 하나로만 치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해방신학이 이 책의 주요 소재는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넘어갔을 수 있으나, 저는 이 지점에서 월터스토프의 1세계적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은영: 저도 민족주의를 논하는 부분에서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저자는 민족은 궁극적 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민족이 정의 앞에 머리를 숙여야 마땅하다”라고 못을 박아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건 굉장히 ‘옳으신 말씀’이지만, 얼마나 공허한 말인가. 특히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막 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제3세계에서 민족주의는 가난과 억압에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식민지적 억압 때문에 민족주의가 태동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마치 민족이 우상인 양 말하는 것은 제3세계의 상황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명: 그렇죠. 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민족주의는 근대화라는 민족집단이 직면했던 시대적 맥락에서 의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만으로 선악이나 가치판단의 문제로 몰고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북문제가 민족문제는 아니잖아요. 경제문제면 몰라도.
은영: 자본주의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을 하더라도, 그 시대 그 민족에게 근대화는 지상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죠. 근대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공동체의 생존이 불가능했던 시대적 맥락을 염두에 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겠지요. 하지만 사실 저자는 신학자이지 사회학자는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야겠으나, 하필 역사학을 한 저희 둘에게는 아무래도 걸리네요. (웃음)
영명: 책을 읽을 때 비판적인 시각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조나 사유를 읽을 때 시대적 맥락을 놓칠 수 있으니까요. 저자가 가진 배경에 대해서도 알고 그 때문에 그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고민하면서 읽는 것은 좋은 독서방식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은영: 이 책은 사회참여를 두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주제를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라는 틀거리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모든 주제가 틀거리로 정리가 될 때는 거기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맥락들이 있기 때문에, 그 틀거리를 만들 때 배제된 것들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작업은 독자가 꼭 해야 하는 작업 중 하나이겠지요.
영명: 네. 이런 한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개인화된 기독교 혹은 자선의 기독교로부터 체제 변혁과 제도 개혁의 기독교로 넘어가는 이론적 틀을 제공한 큰 의미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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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 그러면 지금 한국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우리가 이 책을 왜 읽어야 할까에 대해서 김영명 연구원이 먼저 말씀해주시죠.
김영명: 이 책이 제겐 좀 어려웠는데요. 우선은 학술서를 기대하지 않았으나 학술서의 냄새가 나고 월러스틴이 나오면서부터 과거에 공부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어려웠고요. 두 번째는 의외로 아는 이야기들이었다는 점. 사실 이런 담론이 생산된 지 이미 30-40년이 되나보니, 기독교 세계관이나 하나님나라운동을 지향하는 IVF, SFC, JOY 같은 곳에서는 이미 익숙한 이야기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전체로 본다면 굉장히 ‘새로운’ 혹은 굉장히 ‘좌파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는 점에서, 아~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기독지성사에서 이때 이런 흐름이 있었음을 보면서, 우리가 총체적 복음을 지향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다양한 역사적‧사회적 개념들, 특히 기독교적 개념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미시오데이’라는 하나님의 선교도 그 중 하나죠. 이 책에 나오는 이런 개념들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연습을 하다보면, 사회참여 혹은 빈곤의 해결을 위해서 기독교가 어떤 생각과 고민들을 해왔는지, 어떤 마음과 어떤 태도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은영: 저는 이 책이 80년대 초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월터스토프가 빈곤과 생존권의 문제를 ‘권리’로 인식하면서 설명해나가는 것이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가난한 자나 가난한 나라를 돕는 것이 우리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그들도 생존할 권리가 있으므로 그것을 빼앗는 것은 악이고 그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이런 발상이 참 반가웠습니다. 저자는 백인이지만 시혜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권리의 담론을 끌어온 것이죠. 이는 지금 이 시대에도 빈곤문제뿐 아니라 소수자 문제에도 적용되는 관점이니까요. 결국 이 시대 소수자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동정표를 날리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뿐이다’라고 외치고 있잖아요. 이런 관점을 1981년에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식이 저자에게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실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해 가장 시혜적으로 접근하는 집단도 교회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새롭게 고민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명: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대화가 이 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이 책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이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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