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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슬픔과 허무의 언어를 마주하다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김영명 


슬픔과 허무의 언어들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픔과 허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노와 혐오의 언어들이 난무하는 한편엔 온통 맛집과 아이돌, 드라마 속 로맨스에 관한 언어들 뿐인 요즘이지만, 슬픔과 허무의 감정들은 여전히 어느 구석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누군가의 자살이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나 우울에 관한 여러 통계들이 이를 증명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언어에서 슬픔과 허무의 감정들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이 세대가 자신과 이웃의 슬픔과 허무를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일말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로부터 낯설어진 이 언어들을 기형도의 시들로부터 발견하게 된다.

기형도는 죽음을 다룸으로써 인간 본연의 슬픔과 허무를 직면한다. 죽음이야 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의 소재다.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존재론적 허무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기형도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죽음, 혹은 죽음과 가까운 이들을 그리는 것은, 또한 그가 느끼고 감각하는 죽음을 그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픔과 허무를 마주하는 작업이었을 터다. 따라서 기형도의 언어를 마주하는 것은, 내가 나 주변의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만큼 어쩌면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기형도의 언어가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주는 것은 그의 언어가 관통하고 있는 허무의 세계가 분명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언어가 표현해주지 못하는 슬픔, 그리고 허무와의 조우를 통해 우리는 마침내 우리 안을 잠식하고 있던 부정적 감정들을 구체적인 표현의 형태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이 비단 나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함께 품고 있는 그림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한국의 근대란 기형도의 언어가 비춰주는 회색빛 골조 위에 비로소 살을 입은 것이었다. 성폭행 당한 여공, 길거리에서 객사(客死)한 취객, 홀로 고독히 스러져간 이름 모를 남성, 폐렴으로 인해 둘째 아이를 잃은 어느 목사. 이들의 슬픔과 죽음은 기형도 자신의 그것과 공명한다. 아버지의 실패와 중풍, 몸에서 작은누이의 몸에서 나던 석유냄새 같은 것들. 이러한 기형도 자신의 경험은 시대의 슬픔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니 기형도가 바라본 모든 대상의 슬픔과 죽음은 기형도 그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시어 곳곳에서 대상과 화자는 종종 혼재되어 나타난다.

기형도가 시를 썼던 4년의 시간 동안 한국은 민주화를 겪었고, 올림픽이라는 커다란 행사를 치러냈다. 그러나 시대의 격동이란 시대의 가장 어두운 부분의 슬픔과 허무를 책임져주지 못하는 법이다. 결국 시대의 슬픔과 허무를 짊어졌던 그 모든 죽음 위에는 묘비 대신 휘황찬란한 빌딩이 세워졌다. 기형도의 언어는 현대의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슬픔과 허무를 다시금 되살려낸다. 우리는 그의 언어를 통해, 즐겁고 행복한 것으로 가득 들어차버린 미디어 뒤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슬픔과 마침내 만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 시대에 기형도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형도의 언어를 읽어내는 것은 나, 그리고 우리안의 허무를 만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직면하기 어려운 시대에 허무와 슬픔을 사유하는 것, 나의 슬픔만이 아니라 화려한 외면 뒤에 가려진 시대의 슬픔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기형도를 읽는 것은 의미로 충만한 작업이 아닐까.

죽음을 이야기하는 기형도의 언어들을 읽으며,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던 전도서의 말씀을 생각한다. 슬픔과 허무를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대신 긍정으로 점철된 신앙의 언어들보다 기형도의 언어가 훨씬 더 신앙에 가깝다고 느끼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