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에서 막 해방되어 맨 땅에서 새 나라를 시작해야 했던 그때, 당시의 청년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부푼 가슴으로 무언가를 시작해보기도 전에 남북 분단과 참혹한 전쟁을 겪은 후 남은 폐허 위에서 그들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여갔을까?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밑그림을 그린 그들은 누구인가?
국문학자이자 자신을 “현대 한국학” 연구자로 소개하는 김건우는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책방, 2017)에서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상의 기반을 닦은 주역으로 ‘학병세대’를 주목한다. 그는 제국의 고등 교육을 받다가 일제 말 학병으로 참전하거나 징집될 뻔 했다가 해방을 맞은 젊은이들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기초를 닦은 주역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전시체제기에 학병 징집 대상이 되었던 당시의 청년들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사유의 그물을 짜고(12쪽)’ 정치‧경제‧학문‧종교 등의 다양한 영역의 기초를 놓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학병세대’란 일제 말 학병 징집의 연령 기준을 근거로 1917년 박정희부터 1924년생 김대중까지를 아우르는 세대(13쪽)를 말한다. 고등교육을 받았으되 적극적 친일행위로 몸을 더럽히기엔 아직 어렸던(18쪽) 이 세대 청년들은 해방 후 일찍부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주체로 지목된다. 실제로 ‘학병세대’의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한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장준하, 류달영, 함석헌 등 학병세대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현대 남한 사회를 움직여간 사유의 굵직한 강줄기를 그려볼 수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김건우의 책은 한국 현대사에 주요한 사상적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간결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묶어놓아, 한국 현대사를 기웃거리고 싶은 독자들이 부담 없이 즐기며 공부하기 좋은 책이다. 아직까지 현대 한국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으며 일반인이 읽을 만한 현대사 통사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상황이어서, 역사 관심자들에겐 더욱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표지에 목차를 공개해놓은 이 책은 기독교인들의 눈에도 반갑게 다가올 것이다. 교회를 다니며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김교신,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등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통해 서구 문화에 일찍이 익숙해진 기도교인들은 해방 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각계의 요직을 맡아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삶을 되짚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들이 남긴 족적의 명과 암을 살피며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역할을 성찰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이다.
해방 후 60여 년 간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꿈을 만들고 각자의 방법으로 그것을 실현시켜갔다. 그들의 사상은 좌우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분포했고 출신 지역과 종교도 다양했다. 하지만 해방, 분단과 전쟁,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조건 속에서는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친미 성향의 엘리트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사회적 리더로서 큰 틀에서 대한민국의 사상적 기초를 놓게 되었고, 이 사회는 그 기반 위에서 성장하며 점차 다양한 곳으로 가지를 뻗어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들이 꿈꾸었던 ‘새 나라’의 모습을 아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굵직한 뿌리를 아는 것이다. 김건우의 책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그 뿌리를 찾아가는 초보 여행자들에게 좋은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
박은영 / 복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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