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8.토
아볼로 클럽 철학 강좌
4주차
윤리와 가치
강사: 김동규(서강대)
“모든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윤리의 가장 큰 물음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런 물음을 던진다. 실제 삶에서 옳은 것은 무엇이며, 그른 것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이며, 정의란 무엇인가? 철학에서는 오랫동안 윤리적 물음, 삶의 가치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그리스도인에 행복과 도덕, 정의가 무엇인지 총체적으로 따져 본다.”
서양의 윤리학은 방대하다. 하이데거는 철학은 형이상학이라고 말했지만, 철학은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대 그리스로부터 탐구해 왔던 학문이다. 밀레토스 학파는 자연학적/유물론적 방향으로 탐구했지만, 소크라테스만 보더라도 그의 물음은 무엇이 좋은 삶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경우가 절대 다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을 윤리학이라고 했을 때 (오늘날 분류 방식으로 보자면) 더 해명이 잘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로서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윤리가 무엇인가를 질문해봐야 한다. 윤리란 무엇인가?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 윤리는 그냥 규범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잘 지키는 것을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e.g. 주일 성수, 아벱 모임 전출 등) 그런데 성경을 조금만 읽어봐도 예수님은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아무튼. 몇 가지 규율을 잘 지키는 것으로 윤리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교회의 문화와 발상 자체가 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는 윤리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윤리를 언급하기 위해서 먼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플라톤의 윤리학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윤리학적 질문이 응집된 곳은 <국가>다. 플라톤 <국가> 1권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것이 유력한 입장이다.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치열한 논쟁: 정의란 무엇인가? 여기성 우리가 가장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이 나온다. 트라시마코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반대한다. 그렇다면 각 강자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면 되는가? 예를 들어, 강도 집단 내에서 각자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강도 집단이 와해된다. 강한 사람들끼리 모여도 집단이 유지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인체에 비유해서 정의를 설명한다. 머리:가슴:배=지혜:기개:절제 (덕이 대응한다). 이 셋을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게 정의다. 이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국가의 통치 원리다. 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직관을 가진 철학자 왕이 통치해야 한다. 좋은 것들을 인식하면 이에 비추어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좋은 것들을 직관하면, 좋은 것들의 위계에서 최상위에 있는 최고선을 파악할 수 있고 이에 따라 통치할 수 있다. 지적인 능력을 우위에 놓고, 지적인 직관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플라톤보다도 서양 윤리학의 체계화를 처음으로 한 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니코마코스의 서술 방식이 특이하다. “모든 사람은 좋음을 추구한다.” 좋음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다. 행복: eudaimonia<eu+daimon.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서 삶의 조건들이 위계화된다고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감각적, 원초적, 경험적 차원에서 추구한다. 라파엘라의 아테네 학당 그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을 아래로 가리키고 있다. 그 옆에 끼고 있는 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플라톤이 끼고 있는 책은 티마이오스다. 우주론 책.) 아무튼 행복은 이 세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 윤리의 시발점은 행복이다. (개인+공동체의 행복) “삶의 행복을 총괄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학문은 정치학이다.” (윤리학 1권). 행복은 항상 폴리스를 염두에 두는 것.
행복의 세 가지 후보를 찾는다. 사람들이 통속적으로 이야기하는 행복의 집단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선호되는 것 세 가지를 찾아보자. 이 세 가지의 교집합을 찾아보자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획. 경험적인 차원에서의 접근. (1) 향락적 삶: 예를 들어, 돈을 버는 것. 오늘날에도 가장 강력한 행복의 요인으로 생각됨. (2) 정치적 삶: 명예. 우리가 생각하는 명예와는 다르다. 이를테면,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 같은 사람이 명예로운 사람의 모델. 두 가지 후보 모두 불만족스럽다. 돈을 버는 것은 강제적이다. 정치적 명예는 남이 주어야 얻을 수 있는 것. 내가 원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주도적일 수 없다. 나머지 하나 (3) 철학적 삶. 따라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1권에서 행복의 원초적 정의: 탁월성에 따라 사는 영혼의 삶/활동. 여기서 영혼이라는 개념이 복잡하다. 영혼의 두 가지 구분이 있다. 하나는 지적인 구분, 다른 하나는 성격적인 구분이 있다. 성격적인 구분을 잘 다스리면 인간이 되고 못 다스리면 동물처럼 된다. 우리가 탁월성을 규정하는 규준이 되는 것이 중용(mesotes)이다. 중용에 따르지 못하면 용기는 무모함이 되고 (동물처럼 되고) 적절히 발휘되어야만 용기가 된다. 중용을 따르면 격정의 마음이 절제된다. 2권에서 성격적 탁월성, 중용, 탁월성의 덕목들(관대함, 호의, 용기, 절제 등)을 다룬다. 중용을 실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가져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용은 반드시 상대적이다. 중용은 아무 편도 안 드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중간 지점을 잘 찾아야 한다. (관조도 사실 실천적 지혜 안에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실천적 지혜를 위한 관조.) 아무튼 초점은 행복한 삶에 맞춰져 있다. 물론 이는 쉽지 않다. 죽어서 불행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명회) 아무튼 이런 식으로 행복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다. 관조 자체는 신적인 것이지만, 행복하려면 외부적 조건들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최고의 삶의 행위인 관조(theoria)를 하려면 일하면 안 된다. 몸에 장애가 있어서도 안 된다. 지적 능력에 손상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어윈은 이렇게 비꼬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의 좋은 후보자들이 아니다.” 어쨌든 그런 차원에서 보면 세속적인 삶에 부합하는 내용들이 있다.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했던 행복이다. 이는 자유인들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이것이 서양 전통의 축을 형성한다.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행복한가? 한 번 질문해 볼 만하다. 교회 나와서 오히려 불행하지 않은가?)
행복에 대한 질문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 로마 시대는 세계시민주의 시대. 이런 범 세계화가 진행될 때 분명히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 삶 속에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핵심.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숙명론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연습을 통해서, 아파테이아(평정심)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연극 무대에 서 있는 배우에 불과하고, 그 배역을 잘 감당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계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이 된다. 일종의 영성가들 같은 삶을 추구했다. 이것도 여전히 행복한 삶의 추구. 고귀한 삶의 추구.
기독교 윤리학에서 꼭 언급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 플라톤 전통에 있기 때문에 신체보다는 영혼이 우위에 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할 때 그것은 항상 진리를 발견하는 것과 연결된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행복의 유일한 척도.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철저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우리의 최종 목적은 진리가 아니다. 행복을 위해서 진리를 소유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진리가 현세에서 완전히 소유될 수 없다고 본다. 내세에서 완전한 소유를 이룰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영혼의 내밀한 부분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고 진리의 빛으로 조명을 받음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당신 안에 거하기 전에는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고백록 1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추구했던 것도 행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행복, 지적 관조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학도 행복의 윤리학. 그 안에서 진리는 부수적이다. 진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때 행복한 것이 목표다. 아퀴나스도 비슷하다. 아리스토텔레스+신과의 만남 정도. 참된 지복을 누리기 위한 것이 윤리적 탐구의 근간을 이룬다. 그래서 여기까지 쭉 보았을 때 윤리학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는 행복한 삶이다. 여기로 돌아가야 우리가 윤리에 대한 왜곡된 의미가 벗겨질 수 있을 것이다. 윤리는 단지 도덕 규범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복, 공동체의 행복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만 해도 주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관조 자체가 목적이다. 관조 자체가 행복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유함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고 본다.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목적이다.
*사랑의 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진리를 가질 수 있고 삶을 바꿀 수 있다. 가톨릭의 얀센주의자들이 이 전통을 이어받는다. (대표적으로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지주의의 전통을 한 번 꼰다. 순수하게 주지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플라톤과 구별될 수 있는 성서에 대한 이해, 사랑의 질서, 은총 등의 요소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독특성은 여기에 있다. 이는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기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성격적 탁월성은 개발해야 하는 것. 동양의 유가도 그렇다. 선하게 될 가능성은 가지고 있고 이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이 행복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가 철학에서는 윤리의 주제가 행복인 것 같다.
지금까지 행복의 윤리학이라는 하나의 전통을 보았다. 그리고 일종의 규범으로서의 윤리학의 전통을 세운 것은 칸트다. “세상 바깥에서조차도 제한 없이 선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선의지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칸트의 대결 상대 두 가지: (1) 행복의 윤리학.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 도덕적인가? 좋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인가,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한 것인가? (2) 흄의 윤리학. 요즘 시대에 많은 화두가 되는 동정심 또는 공감(sympathy)의 윤리학. Sympathy<syn+patheia(함께+겪는다). 흄은 인간의 정념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 이 정념을 근거로 해서 도덕철학을 정립한다. 타인에 대해 기쁨과 슬픔의 공감 능력을 가지는 것이 윤리적 삶의 출발점이다. 정말로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세월호 사건 관련) 칸트는 이를 인정한다. 도덕적 소질이 도덕적 삶에 기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도덕적 삶의 원천일 수는 없다. 이유는? 이를테면 우리가 공감의 능력을 가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칸트의 생각은 나쁜 사람과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합리하다. 이는 도덕의 보편타당한 원천이 될 수 없다. 도덕적 행위를 우리가 할 때, 우리는 결과를 생각하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선 의지만 선하다고 할 수 있다. 선 의지가 없이도 선한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의 원천일 수 없다. 공감의 윤리학에서 공감의 대상에 따라서 공감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감의 정도에 따라서 선별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가? 흄에게서는 Yes. 칸트는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제한 없이 무조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선의지다. 이것이 칸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 행복을 버리지는 않는다. 도덕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 아무튼 칸트가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선의지에 입각해서 보편 타당한 도덕성의 원천의 근거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어떻게? 보편적 도덕 법칙을 따름으로써, 선의지(의무와 연관)에 따른 도덕법칙을 만듦으로써 가능하다. 이는 성서나 함무라비 법전으로는 안 된다. 국지적이고 시간에 따라 가변적인 것들은 안 된다. 내용에 의존하면 안 된다. 오로지 형식적이어야 한다. 이성의 요구에 의거한 형식적인 법칙만이 도덕법칙으로서의 기능을 완수할 수 있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 명법이다. (조건적인 가언 명법과는 다르다) 첫 번째 명법: 너의 행동의 준칙(maxim)이 마치 보편적인 입법 원리에 타당한 것처럼 행위하라. 여기서 보편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두 번째 명법: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그 자체로 대하라. 도덕 법칙을 잘 수행해야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도덕법칙에 대한 자발적 존중심이 중요하다. 여기서 근대에서 온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신뢰감이 나타난다. 여기서는 오로지 독립된 ‘나’만이 있다. 내가 사유함으로써 아름다운 도덕법칙에 자발적으로 순종한다. 이것을 칸트가 의지의 자유라고 부른다. 하기 싫더라도 도덕 법칙에 타당하다면 그 마음을 억누르고 의지를 도덕 법칙 아래에 종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보편적인 도덕성의 근간으로 삼을 수 있다. 정언 명법에 종속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규범으로서의 윤리가 여기서 성립할 수 있다고 칸트는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행복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도덕적 덕=행복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내세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도덕성의 완전한 이상을 이룰 수 없다. 현세에서 도덕성의 이상을 이룰 수 없는 경우 내세에서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벌을 줄 수 있는 신, 그리고 현세에서 도덕적 진보가 끝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유명한 칸트의 요청 사상. 상술한 내용들이 칸트의 도덕 철학의 얼개다. // 어떤 사람들은 보편타당성을 근거로 칸트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윤리가 시작된다고 보기도 한다. ‘윤리학’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보편 타당성의 요구를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납득하고 추구할 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중요한 윤리 관념. 윤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범적인 측면 또한 고려해야 한다.
<현대적 흐름>
공리주의 전통도 의미가 있다. 그 시대에서 보자면 매우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흐름이다. 자연법 이론도 있다 (아퀴나스). 신명론(divine command theory). 스코투스나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도 신명론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윤리적 전통이 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윤리를 검토를 해보아야 한다.
현대의 두 가지 경향.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합할 수 있다 (폴 리쾨르).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이 책을 소 윤리학이라 불러달라.” 하나의 명제를 제시: 정의로운 제도 안에서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하여 좋은 삶을 사는 것. 여기에 다 들어가 있다.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레스. 타인을 위하여는 레비나스. 타인과 함께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로운 제도는 하버마스와 롤스. 리쾨르가 싫어하는 것은 절충주의다. 절충주의를 배격하면서도 대립들을 잘 화해시킨다. 이 명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가 종합된다. 윤리학은 좋음(good)에 대한 것(아리스토텔레스)이고 도덕은 규범(norm)에 대한 것(칸트)이다. 이 둘을 어떻게 결합시킨 것인가?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우위에 놓는다. 다만 규범을 통과한 좋은 삶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리쾨르가 보는 윤리의 과제. 규범은 하나의 체가 된다. 체를 통해서 좋은 삶의 요소들이 걸러진다. 이런 방식으로 두 가지를 결합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칸트를 비판한다. 이 규범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리쾨르가 보기에는 항상 관계의 문제로서 규범을 접근해야 한다. 추상화된 형식으로서의 규범을 논하면 안 된다. 리쾨르의 아리스토텔레스적 편향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칸트적인 계기를 부정할 수는 없다.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 정언 명법: 타인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우하라. 칸트의 문제는 이를 법칙으로 만들었다는 것. 인간을 법칙에 종속시켰다. 인격이 추상화되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을 위하고 배려하는 것이 규범에 들어간다면 좋은 삶이라는 과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는 것이 리쾨르의 주장.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타자 이해가 근거가 된다. “우정론”. 그래서 칸트와 결합시킬 수 있는 차원이 있다. 이렇게 두 전통을 화해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새로운 윤리학을 정립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소 윤리학. 물론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정의로운 제도도 있어야 한다. 일단 리쾨르가 생각하는 입장은, 두 전통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화해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리쾨르는 인터뷰에서, 그리스도 윤리도 약간 좀 더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이웃과 함께 가느냐, 이웃을 위해 가느냐가 관건. 기본은 어쨌든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삶을 추구하고 그것은 행복한 삶이라는 것. 여기서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윤리와 좀 차이가 있다. 좀 유연한 접근. 교리로 따지지 말고 놔둘 것을 주장. 두 전통이 무조건 대립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전거가 리쾨르에게서 마련된다.
좋은 삶+규범->함께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하는 것과 관련 맺는 것. 이것이 과제다.
*리쾨르 저작들: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영역본으로 읽을 것. <비판과 확신>, 리쾨르의 인터뷰집.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적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 책부터 리쾨르를 접근하면 쉽다.
레비나스도 중요하게 언급될 수 있다. 교과서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 되었다. 독창적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윤리학이라고만 할 수는 없긴 하다. 전통적인 의미의 윤리학이라고 하기도 좀 힘들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제일철학을 윤리학으로 보고, 그의 철학을 칸트적 맥락에서 초월적 윤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도덕성의 초월적 근간을 놓겠다는 칸트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레비나스도 윤리의 초월적 근거를 놓는 것이라 생각하면 윤리학이라 생각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사상 체계는 복잡하다. 초기에는 타자가 안 나오고, 자기 초월만 끊임없이 물었다. 50년대부터 타자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타자는 레비나스에게서 무한이다. 타인은 규정 불가능하다. 만일 이것이 입증된다면, 타인은 우리의 이성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 가운데에 주어지고 말을 거는 자다. 말을 걸 때 내가 무너진다. ‘집’의 비유. 집은 경계가 있다. 내가 그 안에 거주한다. 집은 내면성의 유비. 타자는 내 집을 무너뜨릴 수 있다. 타자의 윤리적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응답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안 한 것 자체가 accusation, 즉 비난 받을 수 있음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자아는 이미 불의하다. 홉스부터의 서양 전통인 자율성, 자유주의(칸트도 포함)에 대한 반대다. 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면, 내가 자유롭다는 것이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자유로운 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의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도덕성의 근간으로 삼은 도덕철학들은 모두 붕괴된다. 서양 전통에서 자유 정신에 입각한 사상은 공격의 대상이 된다. 레비나스는 이를 통해서 형이상학을 추구한다. 아무튼 윤리학의 맥락에서의 레비나스의 교훈 내지 과제다.
*레비나스의 제3자 개념. 내가 모르는 타인이 제3자다. 이를테면 국가 기관 같은 것. 국가 기관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한다. 레비나스는 정의가 세워지려면 당연히 제3자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금 타인은 배제된다. 타인은 배제되기 때문에 다시 그것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주는 것은 여전히 타인이다. 타인으로 돌아옴으로써 제3자, 국가가 갱신되는 계기가 된다. 제3자를 통해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의 성립은 무조건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리쾨르와 레비나스의 갈림길. 리쾨르는 자기성으로 돌아온다. 반면 레비나스는 타인 지향성을 극단으로 밀어 붙인다. 자기로 돌아가는 지점이 전혀 없다. 리쾨르에게서 자기 동일성을 확보해주는 것은 동일한 이야기다. 이야기 속에서 행위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함. 여기서 타인이 들어온다.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받는다. 이것은 리쾨르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떠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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