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제3회 아볼로 포럼 – 전체특강 강영안교수
‘근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Q1.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즘, Post + modern + ism 이다.
여기서 modern이 무엇이고, 거기서 나온 모더니즘이 무엇인지 그 배경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어떻게 볼것인가가 중요하다.
모던이란 무엇인가? Modern(영), 근대(近代)라는 말로 시대 구분에 쓰는 용어이다.
‘고대 – 중세 – 근대 – 현대’ 로 일반적으로 시대구별을 한다.
템플스 안티구아, 중세(중간 시대 medieval 과도기)라고 나누었다.
시대 구별을 한 그것에 이미 가치가 들어가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괜찮은 시대이고, 앞선 시대는 과도기적인 시대이다.
중세 중간은 가운데 낀 시대, 그냥 지나가도 무방한 시대이다. ’ 라는 가치가 들어가 있다.
근대라는 말은 일본사람들의 말로 가까운 시대라는 뜻이었다.
모던이라는 말은 라틴어 ‘modenus , modus’ 근방, 형태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를 회복하려는 길이 아니라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보캄이라는 사람들이 Via Modena(새길) 라는 것을 불렀다.
그래서 Via Antigua (옛길)과 구별되는 Via Modena(새 길)로 부르게 되었다.
‘오늘의 헌신’ (Divotion Modena) 과거의 추구와는 다른 새로운 헌신운동이 일어났다.
Modenus 과의 헌신운동과는 다른, 하나님앞에서 제대로 살려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 (monasterium) mons 홀로 머무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수도원에서 홀로 살았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제자도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공동형제단, devotion Modena 과거의 추구와는 다른 새로운 헌신운동이 일어났다.
Divotion Modena은 세속을 떠나서 혼자 하나님앞에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일상가운데 밥먹고 잠자고 빨래하는 일상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려고 했던 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루터가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세속을 떠나지 않고, 세속안에서 거룩해 지는 삶. 일상 삶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운동이었다.
Modern은 ‘새로움’이란 뜻이 있다.
Modrenism은 ism : 이론, 체계, 사상, 형식에서 붙이는 희랍어에서 왔던 말.
Modrenism :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정신, 삶의 방식, 사고 방식.
Modern 이라고 할 때는 무엇을 통한 새로움 이라는 거다.
19세기에서 모던이라고 부를때는 옛날 것 단순히 시간적으로 과거라는 뜻이 아니라, 낡은 것.
지금은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야 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을 통한 새로움인가?
근대주의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움의 원천은 무엇인가?
무엇을 통한 새로움, 어디에서 새로움을 발견할수 있을까?
누가 새로움의 담지자(무엇인가를 뚜렷하게 품고 있는 사람)이겠나?
Modernism을 이성을 통한 새로움이라고 하면
‘New’ 와 ‘Old’ 의 구도로 보면,
낡은 것들은 이성과 대비된 것을 생각할수 있다.
이성이라는 말은
理性 - 우리의 전통(동양)에서 성리 라는 말이 있었다.
만물의 성리
19세기에 등장한 말.
理致 리(옥의 길, 갈라짐) 다듬고 손보다. 옥의 길을 잘 찾고, 다듬어 가는 것.
이성(理性) : 인간과 사물에 주어져 있는 어떤 구조와 형식, 법칙을 찾아 내는 인간의 본성
Reason 은 라틴어 ratio에 나온 말로 ‘다시 추론하는 것’을 말한다.
Reason 은 추론할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추론하려면 뭐가 주어져야 하는가? 결론을 내기 위한 전제들이 필요하다.
이성이라는 말을 확대하면 같이 들어 있는 것이 지성 (intellect) 이다.
Modernism 인간의 인식능력에 의존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 새로운 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삶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삼을 이어가겠라는 것이다.
이성은 뭐에 대한 대립이냐, 그래서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성이 거부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신앙과 전통, 선입견(prejudice)이다.
이성 – 스스로 생각한다. 남이 해놓은 생각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 – 자기 자신이 검토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교회의 권위거나, 성경의 권위이다.
신앙, 귄위, 전통, 선입견을 거부한 시대를 모더니즘이라 할수 있다.
Traditional - Modern - Postmodern
신앙 이성
전통
권위
전통에서는 내가 스스로 안게 아니라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우리의 삶과 이해에 중요한 요소다.
Modern 은 모든 ‘이성’ 의 법정에 따라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시대적으로는 계몽의 시대였다.
인간 이성의 자연의 빛. 이것을 제일로 놓고 본 시기이다.
계몽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있는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다. 칸트
미성숙이라는 것은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없은 무능력을 말한다.
감히 알려고하라 그것이 계몽의 표이다.
너 스스로 생각해라, 계몽의 표어였다.
신앙과 전통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해라.
이성의 법정 –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이 이성의 법정이다.
과연 그러한 주장이 정당성을 확보할수 있는가 권리를 입증받아야 한다.
권리가 있는가 없는가
우리 사회에서는 전통의 요소가 강하다.
이성의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고 계몽의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이 되어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어떻게 이야기 할수 있을까?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는 것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판할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가?
이성에 과연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떻게 이성을 극복하려고 하는가?
1. 자끄 데리다 – 전통 형이상학은 하나의 구축, 구성물이다. (배후에 하이데거) 구축의 근본정신은 현존의 형이상학이다.
deconstruction 해체
생성과 구성을 어떻게 발생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 되었는지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
대상이 TEXT가 된다.
이성이나 전통 등을 통해 구성물을 해체해서 그것이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줌
2. 미셸 푸코 – 역사학자. 수많은 현상들, 제도에서 볼수 있는 감옥, 병원 제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권력화 되었있는가 드러내는 작업을 했던 사람.
말의 질서 : 모든 제도나 행위는 모두 권력이나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가 일정하게 포함시키고 배제시키는 권력이 포함되어 있다.
지배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 공동체 사회, 하부마스.
푸코 - 힘, 권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성적인 정당성에 따라서 우리의 행위, 삶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힘, 말, 체계가 우리 삶을 가늠케하는 선언적 조건들이다.
3.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적 조건 – 리오타르
서양의 역사는 큰 이야기에 지배를 받아왔다. (메타 내러티브, 메타 담론)
인간의 역사는 하나의 절대 정신의 발전 역사다.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로 본다.
메타 내러티브의 시기는 가고, 작은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지기 시작하고 그것에 귀기울이는 시대가 왔다. 큰 사상, 이념,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삶을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작은 것들 소박한 것들, 크게 내세울수 없는 것들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게 된다.
4. 라깡
1.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2. 우리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은 접근 불가능한 곳, 라깡은 무의식도 접근가능하다.
환유, 은유.. 메토닉,
메타포, 의 구조로 언어가 구성되어 있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무의식이 표출되는 것.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인간은 타인이 바라는 그것을 바란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 자신의 주도로 갖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바라는 것.
나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타자의 비해서 부수적인 하나의 파생된 의미를 갖는다.
가다머 – 권위와 전통과 선입견을 근대 사상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서 비판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와 전통, 선입견이 선조건이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중 –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
1. 모든 것을 의심하라 – 진리의 규칙, 명증의 규칙
2. 복잡한 것은 간단하게 나누어라 – 분해의 규칙, 분석의 규칙
3. 단순한 것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라 – 종합의 규칙, 합성의 규칙
4.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전체를 보아라 – 매거와 통관의 규칙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번째 규칙이다/
비판적 태도, 의심하는 태도가 근대의 지적, 경건성의 태도이다.
마이클 폴라니 -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 할수 있는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폴라니는 암묵적 지식이 깔려있고, 다른 지식이 쌓여 간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식을 비판할수 있다.
그 밑바닥에는, 폴라니와 가다머는 같은 방식을 가지고 있다.
암묵적 지식개념이나 통합개념이다.
레미나스 : 근대 철학만을 비판, 한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 전체를 비판했다.
레미나스가 지향하는 것은 평화의 철학이다. 제국의 철학, 소크라테스 이신론, 존재위주의 철학이었고, 나와 다른 것은 철저하게 종속시키거나 배제시켰다. 타자에 대한 알러지 현상을 보이는 것이 서양철학의 특징이라 보고 새로운 타자 철학을 내세우게 된다.
Q2. 칸트가 말하는 탈 이성의 탈계몽주의적 해석이란?
칸트에서는 이성 사용의 위기이면서, 이성의 위기는 없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칸트의 이성비판이라는 것은 이성이 어디까지 형이상학의 문제에 관해서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신의 존재,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가 사멸하는가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문제에 대해서 이성은 어느정도까지 판단할수 있는가 그런 문제를 따지는 것을 비판이라고 불렀다.
비판을 받는 역할이 이성이면서 수행하는 역할이 이성이다.
이성은 검사이면서 변호사이면서 판사이다.
계시, 종교, 전통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따져 보니까 이성의 범위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수 있는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수 있고, 영혼의 불멸성, 신의 존재, 이세계의 유한성 무한성에 대해서 이성이 확실하게 판단할수 없다는 것을 이성의 이름으로 판단을 내리고 있다.
1. 이성이 비판의 대상이면서 검토의 대상이 됨에 따라 이성에 대한 신뢰에 대하여 끊임없이 검토하였다.
칸트의 이성에 대한 신뢰의 해석
1. 계몽적 해석
- (기독교 신앙, 사회 통념을 버리고) 이성을 절대적으로 내세운 철학이었다.
2.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창조의 결과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는데, 인간의 눈이 어두워져서 (타락) 이성이 이성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도덕적 행위에 관해서) 선한것에 대한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선의지, 악에 대한 성향-향준악으로 인해서 선을 행하기 보다는 오히려 악을 향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은 전혀 계몽과는 상반된 사상이다. 계몽이라는 것은 인간의 선함,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할수 있고 완벽한 선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인게 계몽의 정신이라면
칸트는 계몽이 드리운 어두움, 계몽이 전혀 성공할수 없는 의지가 인간에게 있는 근복적 악에 대한 성향때문에 우리에게 선에대한 의지가 있더라도 선의 의지를 실천할수 없다. 그러면 선의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우리에게 있는 선의 씨앗을 전혀 개발할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의 구속이 들어온다.)
지금까지 칸트의 해석에서는 이것이 최소화 되었다. <전통적 계몽주의적 해석>
탈계몽, 계몽을 벗어나면서 칸트를 보면서 계몽과는 다른 얼굴 계몽의 시대정신으로 보면 수용할수 없는 근본악의 개념, 도덕적 자기 완성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칸트는 드러내 보였다. 이성의 한계와 종교 에서 교회(교회 공동체)에 윤리적 공동체에 대해서 기대를 걸고 있다. 윤리적 공동체로서 교회가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안에서 교직제 형식주의에 대한 지적들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물이 되는 지 말하고 있다. 교회의 제도적, 외적 신앙의 준수가 아니라 철저하게 내면의 변화, 내면적 거듭남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빚어질수 있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인간이 선해질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계몽의 철학에서 칸트를 해석하면 이부분이 최소화 되었다.
철학의 흐름이 근대철학을 다시 돌아보면서 철저히 계몽에서 칸트를 읽는 것이 정당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흐름이 나오고 있다.
공식적으로 칸트의 90%는 계몽주의적 해석과 맞다. 하지만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칸트의 강의록 에서 칸트의 속마음이 많이 드러나 있다. 이것은 최근의 연구에서 드러났다.
Q3. 1)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제한다고 볼 수 있는가?
Reason : 극대화된 이성, 죄종적 신급(신級)으로 추앙받은 이성.
reason :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
근대철학자들은 데카르트, 칸트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할수 있다고 봤다.
전통, 선입견을 모두다 배제하고, clear and dis idea 그게 폴라니, 가다머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착각이다.
폴라니 fiduciaty 하나의 믿음의 틀로 본다는 것인데.. 어거스틴을 인용한다, 믿지 않으면 볼수 없다. 믿음이 신뢰가 무엇을 먼저 믿지 않고서는 알수 없다. 믿음이 지식의 선행 조건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성에는 말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서로 말을 주고 받을수 있다. 처음부터 말의 전달성 이해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하면 하나 하나 따져 보고 시작할것이다.
현실적으로 항상 이성과 지성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과 지성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나 권위 등 많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그동안 기독교인들도 모더니스트 흉내를 많이 했다. 대표적으로 변증학이 있다.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봐도 뒤지지 않는다. 검증학- 경험을 통해서 증명한다, 이것이 철저한 모던 프로젝트다. 신앙은 그런게 아니다. 신앙은 과학이 증명하니까 참이고, 경험적으로 증명하니까 참이다라고 할수 있는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던 프로젝트랑 닮아 있다.
대표적으로 근본주의 – 축자영감설도 근대적 프로그램과 관계가 있다. 우리가 경험할수 있는 것명석 판명하게 판명할수 있는것에 도달할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이다. 원래 하나님의 영감으로 쓴 원본은 오토그라프는 한글자도 오류가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 이집트에서 구약 75명, 신약70명 칼빈도 숫자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숫자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거듭나고 하나님 닮은 성품으로 빚어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다. 우리가 모던 프로젝트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교회가 신학이 젖어 있는 그것(모던 프로젝트)에서 벗어날 이유가 된다.
우리 교회가 신학이 젖어 있는 모던 프로젝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2) 기독교인은 레비나스의 철학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
레비나스의 프로그램을 적용해서 모두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겠다. 레비나스의 주장을 인간의 사회 구성, 제도화하게 하는 기본적인 관계는 ‘기브앤 테이크’다. 주고 받는 것이다. 글의 관계가 없다면 생산, 소비활동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글의 관계의 기본적인 개념은 상호성이다.
모든 관계가 글의 관계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글의 관계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형성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의 글의 관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레미나스 사상을 전면적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하자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타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기고 반응하는 방식이 우리 삶에 깔려 있다. 1/10 1/100 기독교 용어, 카리스 은혜 – 거저 주는 것, 대가없이 주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 삶이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수 있는 힘이 된다.
그것을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그것을 선지자들의 목소리로 이해하고, 우리가 일상의 삶에 빠져있을 때 삶을 깨워주는 목소리로 들을 때 그런 철학이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Q4. 근대와 포스트모던을 구분하는 사상과 역사적 사건은?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역사적 사건
1. 르네상스
2. 종교개혁
3. 근대과학혁명
4. 자본주의의 발생
르네상스를 르네상스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데, 계몽주의의 휴머니즘과는 전혀 다르다.
계몽주의적 휴머니즘 (세속적 휴머니즘) – 인간 자체가 삶의 주인이라고 보는 것, 인본주의를 뜻함.
르네상스 휴머니즘 – 인문주의
인문학의 부할, 인문주의를 뜻함 – 인문학의 부활이다. 역사와 철학.
발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르네상스에 가장 공헌한 사람)
에라스무스가 한 일은
1. 고대 문헌들을 믿을수 있는 글로 정리했다.
신약성서가 믿을수 있는 판본으로 다시 정리했다.
루터 종교개혁 2년전에 신약성서가 판본으로 나왔다.
2. 고전문헌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삶의 모범을 찾았다.
3. 고전문헌에서 찾은 삶의 모범을 교육했다.
아드 폰데스 ad fonte (to the source) 원천으로 돌아가자.
성경을 신앙에 대한 회의라고 하는게 철저하게 역사적이고 문학적이고 수사학적인 것
1. 이성 주도적인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발하면서 전통적 대학 지식에 대한 신앙의 회의가 있었다.
2. 종교 개혁을 통해 교회권위에 입각한 가톨릭 교회의 신앙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원천을 성경에서 다시 찾자라는 운동.
과학혁명의 경우 코페르니쿠스 천체 연구에 대한 책을 편찬한 사람은 요시안드라는 루터교 목사였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부르는
전통적 과학적 신앙을 뒤집어서 새로운 근대과학적 신앙을 심었다.
이 때 이야기하는 신앙은 교회 신앙뿐만아니라 전통적으로 옳다고 믿었던 것들에 있어서 회의가 발생했다.
이성을 내세웠는데, 칸트, 로크 같은 경우 이성은 최소 조건이다. 적어도 믿을수 있는 건 이성밖에 없다라는 의식이다. 만약 그게 없었다면 인간의 지식, 도덕이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내세울수 밖에 없는 거다.
불란서 달랑 베르, 디드로, 불란서 계몽주의자. 이성의 우상화, 우상화된 이성.
근대와 포스트모던시대를 구분하는 사상
1. 마르크스
2. 니체
3. 프로이드
1. 마르크스의 주장 :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인간의 경제적 상태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존재는 사회경제적인 관계다. 물질적 관계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 가를 결정한다.
10년전 사회의식 구조 조사. 전도사 가장 급진적 변화를 추구, 목사들 중도, 장로들 보수
수입이랑 비교해보니 일치했다.
현재
2. 니체의 주장 :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의지가 존재의 근본적 원리이다.
3. 프로이드의 주장 : 무의식이 인간을 지배한다.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면
- 한스 큉 – 1차세계대전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환이라고 본다. 1차 세계대전 이 모던이 깨지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라고 본다.
1차세계대전 이전의 철학책에는 의미에 대한 물음이 거의 없었다. 1차대전 이후의 책들은 다음과 같은
1. 의미에 대한 질문
19세기 니체, 고통받는..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은 고통받는 사실이 아니라 왜 고통받는지 그것의 의미 Sinn(The sense, meaning) 를 모르기 때문에 그게 괴롭고 고통스럽다.
철학자들이 20세기에는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상당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 이전에는 왜 사는가? 왜 존재하는가? 이 물건이 무엇인가? 비교적 명백한 답이 있다. 분명하게 존재목적과 존재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할수 있다. 그럴때에는 의미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물을 필요가 없다. 의미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미 주어진 것으로 파악했다.
1차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이성을 토대로 해서 완전한 사회를 만들수 있다는 꿈들이 깨어진 상태에서 시작해서 다시 의미에 대한 물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형상학, 구조주의, 실존 철학, 영미 분석철학에서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 철학에서 의미가 가장 중요한 역설적이게도 의미에 대한 물음이 우리가 먹고, 마시고, 타인과 함께 숨쉬는 이 행동에 대해서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철학자, 지식인들의 활동으로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행위, 고정된 자리 의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거에는 일정하게 다 자리가 있었다.
이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일정한 자리가 없고,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스스로 자기 삶을 만들어 갈수 있다.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s)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이라는 글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서 에덴동산에 두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담아 나는 너에게 일정한 본성, 형식, 폼을 주지 않았다.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스스로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 갈수 있다. 너는 너 자신의 조형자 maker 이고 스스로의 molder가 되어서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너는 천상적 존재, 지상적 존재도 될수 있고, 불멸의 존재, 죽을수 있는 존재도 될수 있다. 이것은 너의 선택, 자유에 달려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의 핵심 개념은 자유이다.
자유에 대한 문제 –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 질 때 자유를 통해 어떤 방법으로 살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게 근대와 탈근대에서 문제가
2. 자유에 대한 문제
의미는 어떻게 부여할수 있는것에 달려있다. 자유라는 것은 일정 사람들만 자유로웠다. 나머지는 종속된 삶이었다. 모더니티(근대성)을 경험하면서 적어도 원천적으로 자유가 주어졌다, 자유로운 사람이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던 수사에서 경험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자유롭다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부분에서 다른 무엇에 의해서 지배 받고 있는가. 광고에 의해서 정치적 이념에 의해서 소비사회의 왜곡을 통해서 제약을 받고 있는가
3. 영성에 대한 문제
의미 추구를 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다.
잘못 나오고 있다고 생각되는 점이 현실적 삶과 유리된 일종의 초월적 영성의 추구이다.
성경, 레비나스, 폴라니 영성은 철저히 세속적 영성의 추구이다. 일상의 삶을 떠난 영성이 아니라 일상적 삶가운데 누릴수 있는 영성이다.
예를 들면, 먹는 것- 누구를 먹는가? 나를 먹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먹지 못한다. 우리가 먹는 것은 내가 아닌 타자이다. 이때 타자는 나에게 들어와서 동화가 된다. 동화가 된 상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화(異化)되어서 배설된다. 이렇게 물질대사가 되는게 삶이 되는 것인데..
우리가 먹는 것은 죽은 것들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성찬 예식이다.
우리가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이 하나의 성찬 예식이다.
물고기, 소의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생명이 삶이 가능해지는 사건이다.
영성이라는 것은 현실적 삶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잠자고, 생활하는 것에 영성이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는가 수행되는가에 영성이 있는것이지 이것을 떠난 것은 수도원적 영성이다.
신앙생활, 제자도, 영성의 삶은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의 삶이다.
밥먹는거, 공부하는것, 가끔은 레비나스, 폴라니의 책으로 씨름하는 것.
-참된 영성 회복은 물질성의 회복이다.
우리의 몸, 살, 철저히 근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수적인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관점 철저한 이성 중심의 사고가 깨어지면서 우리는 먹어야 하는 존재고, 입어야 하는 존재다
이것을 강조한 철학자가 마르크스고, 포에바흐(?)- 유대적 영성, 물질성에 연관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유물론자 일수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의 물질성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정말 귀하다는 사실이다.
C.S 루이스의 기적을 보면 성육신의 의미의 중요성을 읽을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모더니즘의 사고의 깨뜨러짐과 함께 가능해 졌다.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 제임스 K.A 스미스
Q5. 철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독교인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가다머, 이해한다라는 형상을 이야기 할 때
우리가 흔히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남의 자리에 서서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거다.(역지사지)
독일사람 – 이해한다는 것은 sick sel versel 다른 사람의 자리에 나를 놓는 것.
그게 과연 하는 하냐?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 – 나의 지평을 넓혀서 내 지평만 유지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지평과 만나서 서로의 지평이 융합되어 가는 과정이다.
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함께 공동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이해를 하는 길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주체 – 주체라는 것은 타자의 타자이고, 저 타자도 타자의 타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 없이 주체라는 것이 설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를 수용할수 있는 전 단계
레비나스의 ‘타자의 수용’ 진정한 주체는 타인의 고통을 짊어져 주는 존재이다.
Subject 아래로 들어간다. 업어주는 존재.
갈5장 자유롭게 한 것은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쓰기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안에서 종노릇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하셨다.
사랑안에서 종노릇한다는 것은 종노릇 할수 있다는 자체가 정말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면 할수 없다.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것은 참된 종이 될 때 참된 자유인이 된다. 참된 자유는 참되게 섬길수 있는 자리에 섰을 때 가능하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 데리다 , 가다머, 레비나스 이런 사상가들을 읽을 때 그대로 받아들일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두가지 용도로 이해할 수 있다.
1. 반면교사
2. ‘근대’라는 우상파괴
그다음은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를 귀기울이는 것이다. 근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사상의 궤적들을 되돌아보고 성경을 보게되면, 성경이 놀라운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전한 수동성 – 질문을 주고 받으면서 읽을 수도 있지만 그안에 완전히 들어가서, 잠겨서, 상처받을 준비까지 하고 읽는 상태
우리는 다시 돌아가서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질문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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