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차 10/18(토): 철학과 이성, 그리고 신앙
- 철학은 단지 사유하는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과 철학함이 무엇인지 공부하고, 이 정의 아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이성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한다.
철학과 이성, 그리고 신앙
2014.10.18(토)
(모든 것을 다 적지 못했습니다. 짧게 읽어봤는데 비문이 너무 많네요…)
개론서로 추천할 수 있는 책은 ‘메타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유럽 전통과 영미권 전통을 나눠서 잘 결합한 책입니다. 한 권으로 나온 책 가운데에서는 철학을 잘 알려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브가르? 덴마크의 학자입니다. 덴마크는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키에로케고르라는 사람에서, 덴마크의 자랑 키에르케고르 센터가 있을 정도로. 우리도 한국의 사상가 가운데서 발굴을 하기 해야 하지만. 유럽철학에 대한 이해. 유럽권 전통, 영미권 전통을 잘 흡수한 책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공부하러 모였는데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철학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것이 첫 번째 주제가 될 것입니다. 서론을 각설하고 두 가지의 문제
당위의 문제. 히브리서 3장 1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성경에 제가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분당의 한 목사님이 찾아봤는데 성경에 기도하라보다 생각하라는 말이 더 많다고 합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의무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말이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으로 신명기 3장 1절.
히브리서 비나. 깊이 이해를 구한다.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도 곳곳에서 생각하라, 깊이 검토하라는 말은 깊이 연구하고 통찰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고, 우리에게 의무처럼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한데 신존재 증명의 내용이 담친 책이긴 합니다만 Credo ut intellign, fiden queren intellectum.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그리ㅡ도인으로서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믿어야 한다. 은총을 통해서든 어쨌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된 것인지 항상 이해를 추구한다. 신 존재증명을 전반부에 시도하지만 어려운 증명이긴 합니다만 그것을 보고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빛이시고, 광대하신 분이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 전통에서 그 이후에도 생각하고 이해하고 알기를 힘쓴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과제, 당위일 것이다.
좀더 삶에 밀착하여 생각해보자면 철학은 존재의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철학이라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그 기원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스 인들이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가 성경이나 히브리 정신에 철학적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는 있지만 그것이 철학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기원에 대해 철학이 무엇인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철학, Philosophy. 지혜를 좋아하는 것 지혜를 욕망하는 것. 철학에 대해서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기원이 나온다. 철학이라는 것은 없었던 것은 아닌데 기원전 6세기 소아시아 지역에서 탈레스, 등등 철학적인 탐구를 했다. 제일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연구해 보면 철학의 알 수 있는데 가장 궁극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정의가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탈레스가 우주의 기원은 물이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빈약하지만 이러한 정의들이 있다.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철학은 가장 궁극적인 것.
수학의 궁극적인 것. 수의 가장 궁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현상학자의 ‘후설’이 자기 철학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칼을 갈았다. 계속 또, 또 갈았다. 결국 칼 날이 없어지고 칼 자루만 남았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물어 들어가는 것이 철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6세기부터 이어져온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철학의 요소이다. 우리가 주제를 가지고 탐구하지만 철학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진다. 생각이 누적되고 침전퇴는 속에서 철학이 다시 꽃을 피운다. 역사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철학의 역학이다. 따라서 우주의 근본에 대한 탐구에 대한 것을 철학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이러한 사유 방식이 철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언급되는 사람은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 그 이유가 있는데 이사람들 이전 사람들은 자연, 우주에 대한 탐구를 해왔다. 이 사람들로 넘어오면서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탐구하는 영혼의 능력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영혼 하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는데, 영혼이라는 것은 인간을 궁극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한것. 아리스토텔레스. 식물도 영혼이 있딱 ㅗ본다. 식물의 영혼은 영양을 섭취하는 능력
동물의 영혼은 장소를 이동하는 능력, 인간은 두 능력을 가진 다음에 이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상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나올 수 있따. 영혼은 기능적, 능력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유체이탈 이런것과 다른 측면.
실제로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플라톤도 창조론자인데. 또 독자적으로 만을어진 것이 영혼. 독자적인 영혼을 확보하는 것. 영혼에 가장 관심을 가진 사람이 소크라테스. 그래서 우리가철학을 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만큼 높은 칭송을 받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보자면 그당시 그리스 사회의 분위기가 있다. 그리스는 민주정치가 서양최초로 발전했다는 도시국가. 직접민주주의, 그러면 자기자신이 자유인의 위치에 있다면 자기 자신이 정치적인 발언, 자신을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유능하고 인기있던 직업이 소피스트. 여기서 소피아라는 말이 나온 것. 지혜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때의 철학은 능수능란함을 말한다. 술책, 지략이 소피아에게 부과가 됬던 것이다. 지금도 진실과 사실과는 무관하게 법정에ㅓ 뛰어난 변호사를 고옹해 이득을 챙기는 것 처럼 그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우리가 늘 지성을 사용하지만 테크니컬한 의미의 사고일 수도 있따. 이익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전락하기 쉬운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 이 사람들은 기술을 파는 사람이지, 사고하는 사람은 아니다. ‘변론’이라는 소클테스의 책 소크라테스가 왜 존경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는 책.
변론1. 젊은이를 타락시킨다. 변론2 아테네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사유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가 좋음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아가톤이라고 히랍어로 말하는데 좋음 좋음을 dnlgoj .좋은 삶을 위해서 . 영혼의 좋음을 위해서. 영혼의 탁월성. 아르테라는 것을 두가지로 번역하는데 첫 번째로 덕, 다른 말로 탁월성. 잘 가꾸어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 영혼의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좋은 삶이다.
책을 보면 싸움 실력도 좋고, 멋진 남자가 있는데 소년애가 유명했다. 이 멋진 사람을 소크라테스가 쫓아다녔는데 당신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왜 나의 몸을 탐하지 않는가?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는데 너의 영혼이 잘되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몸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 영혼이 원숙하기 까지 시간이 걸릴 텐데 몸이 볼품없어 질지라도 소크라테스는 그것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소크라테스가 하는 중요한 말이 너 자신을 알라. 또는 너 자신을 배려하라 라는 말을 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너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이라는 것은 영혼의 삶,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극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이고 영혼의 탁월성을 가꾸는 것이다. 영혼의 근본적인 좋음을 위해서 애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아우구스투스에게도 발견되는데, 바깥으로 나가지 말고 자기자신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남김. 진리는 자기 자신, 내 영혼의 내면 속에 있다. 라는 말을 한다.
철학이나 인문학, 자기개발하고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여기에 있는데 이것들은 자기 내면을 보는 것이 아니야. 외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기르는 것이 강하다. 그런 인문학, 철학은 자기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영혼을 탁월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것은 영혼의 탁월성을 위해서 내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이것이 단지 1인칭인 ‘나’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고대로 들어간다면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은 업다. 우리가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의 자유가 없다. 서양에서의 나라고 할 때는 폴리스의 나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리스의 시민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덕이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의 고민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에게 어마어마한 관심을 가졌는데, 철학자가 가진 사명이 이것이라고. 자기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사람의 영혼을 걱정해주는 것. 소크라테스는 죽는 그 순간까지 그리스의 시민이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았을지라도.
저는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최고로 훌륭한 선생님을 함께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청년들을 위해서도 돈을 아끼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철학을 정말 추구한다면 그들이 정말 행복해 지기 위해 돈이든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 철학이라는 것은 내 영혼의 탁월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시민들을 위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영혼의 탁월성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묻는다면,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묻고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전체를 본다면 소크라테스는 용기, 등등 답을 찾지 모하지만 끊임없이 그것을 묻는 것이다. 끊임 없이 찾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해보자면, 과연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가? 소유 개념으로 갖고 있는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유한한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철학을 시작할 때 모른다. 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시>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
신은 무엇이냐. 신은 파악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 그래서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신에게는 가능. 구원 용서. 우리는 그 간극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또한 철학을 한다고 했을 때 죽는 그날까지 묻고 따지고 탐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참 진리가 무엇이고 궁극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플루타고스?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사람들은 높은 강당에서 강의 해야 한다고 생각.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높은 강단에 앉아 가르치지 않았고 제자들과 같이 농담하며 같이 술을 마시며 철학을 하였다. 일상의 모든 것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크라테스,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알 수 있는 ‘철학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부.
철학은 삶의 양식이고 방식이고 좋은 삶을 위한 훈련이다. 생각, 사유를 하면서 영홍의 궁극적인 힘을 힘입어서 하는 것이다. 역시나 시대가 변화하고 바뀌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무수한 질문을 던져서 그 질문을 논파하는데 끊임없이 선생을 찾으려고 했다. 배우고 이와 더불어 중요해 지는 것이 배움이 철학자들에 대한 배움이라고 한다면 철학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은 텍스트가 된다. 철학자의 문헌들을 위해 철학자들을 알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평이라는 곳에서 철학을 다시 알 수 있다. 우리 눈 앞에 주어진 시도들, 많은 철학자들의 시도들의 집약체가 텍스트. 글이라는 것. 그리스도인에게도 익숙하다. 그리스도인의 종교도 텍스트에 의존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근거에서 철학자들의 말에 의해 철학을 해 나갈 수 있다. 우리가 근대 이후 중세시대부터 태동하였던 대학, 학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칸트는 대학 안에서 제도화된 학문. 학교, 학술 개념의 철학/ 세계 또는 세상 개념의 철학이 있다고 구분한다. 전자는 앎의, 인식의 논리적 이상적인 인식의 체계 개념, 논리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학문체계, 이성체계에 걸맞는 철학의 측면이 있다. 공부 연구라는 특의 추구.
그러나 칸트는 세계 개념의 철학을 내놓는데 하나의 이상의 원형을 추구하는 것. 영혼 이성의 좋음 완전함을 추구한는 측면의 개념에서 철학의 개념을 여전히 남기고 있다.
우리가 철학을 한다고 하면 이 두 가지를 하는 것을 말하는데, 논리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 더 나아가 이성의 좋음을 완성하는 것. 이것을 도덕이라고 한다 단지 지식의 차원에 제한되지 않는 것. 좋은 것 옳은 것을 추구하는 철학의 개념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칸트에게 그 이후 우리에게 논리를 추구하는 철학을 해야 하지만 생활양식으로서 늘 좋은 것, 참된 것을 따져 묻는 철학함을 갖추어야 한다.
철학에서의 텍스트의 의미. 철학함의 의미는 텍스트 앎 이해를 추구한다는 부분에 있다. 늘 묻고 답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늘 성서를 읽을 때 성경을 외우지 않고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하나의 율법화 관습화 되는 기 때문에 신앙의 진보가 없는 것이다.
학술적으로 철학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폴리스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끊임없이 이해하고 생각해야 한다. 지평융합이 우리 가운데에 늘 일어나야 하는 것이 철학함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텍스트를 읽어감에 있어서 나타나는 이해의 사건, 삶의 진보 등이 철학함으로 흡수될 수 있다. 철학과 철학함의 의미, 사유의 의미, 영혼의 탁월성을 갖추는 것. 고립된 나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 있는 나로의 탐구. 텍스트를 매개로 하는 이해의 사건이 우리가 말하는 철학함일 것이다.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를 이해해보아야 하는 지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것은 이성과 신앙이라고 했을 때 역사가 매우 깊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그 이후 사도, 속사도, 교구시대를 지나면서 신앙이라는 것은 판단, 추론뿐만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사람들이 이성과 신앙의 충돌 갈등이 일어난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앙적인 근본 변화에서 이해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의 질서라고 하는데 마음의 질서의 최초가 사랑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영향을 받아 근대로 넘어와서 ?? 사랑의 질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하지가 않은데 이성적 사유를 하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지식의 수준이 있다고 생각해왔다(믿음이 없더라도) .
‘토마스 아퀴나스’ 가 살았던 이 시대에는 신앙이 없었다(?) 루터나 칼뱅도 이 바탕 아래에서 신학을 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자연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리의 몫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이성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면서 원인의 최초하면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다. 라는 식으로.
우리가 아퀴나스를 놓치는 부분이 있는데 끝마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런 정도로 신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신은 이 정도의 신이지, 신은 더 높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는 것의 이상의 신은 은총을 입어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만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신앙과 이성의 추구를 이야기 했다.
신앙과 이성은 갈등하고 대립하는 양상이 아니라 조화를 추구하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통제하는 신념이 있다. 통제 신념을 따라서 이성을 추구하고 있는데 통제신념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리나 모든 사람에게.
신념을 기반으로 해서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일반적 사실의 문제라는 것이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느슨한 토대 위에서 사유를 한다고 했다고 했을 때 신앙과 이성은 조화될 수 있다. 우리가 신앙이 먼저, 제일이라고 착각한다고 할 때, 오류화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대치가 아닌 조화, 순환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과 신앙의 순환관계. 하나를 절대화 하는 폐쇄적인 구조로 갔을 때 어느 부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라는 입장.
그랬을 때 그리스도교도 철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있었다. 중세의 모든 철학자는 그리스도교 철학자라고 말하고 정당화하려고 많이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이것이 가능하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리스도교 철학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의 마인드를 가지고 철학한다고는 할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신존재증명의 시도를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 부를 명분이 없다. 우리가 하는 작업은 나의 신앙을 철학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신앙에 대한 지향, 개방이 있느냐, 이 차이만 있다고 생각.
그리스도교 철학은 없지만 그리스도교에 의한 충격, 계시에 의한 충격을 받을 수는 있다. 계시의 전통 및 논리에서 오는 독특성이 있기 때문에. 기술에도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에서는 그래왔다. 이 충격에 의해 철학의 역사가 뒤틀려왔다. 중세, 근대 철학도 늘 하나님의 물음 때문에 철학 자체가 충격을 받았다. 이 충격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이 철학을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은 아닐 지라도 이 반응으로서 철학을 할 수는 있다. 온전한 삶을 위해 우리가 드려져야 한다면 철학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적 표현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라는 견해를 갖는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인으로 철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철학을 하려면 먼저 배워라. 철학에도 진리가 있다는 것을 먼저 배워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먼저 공격하고 비판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배우고 반응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Q1. 메타철학이란 무엇인가?
편중되지 않고 철학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겠다. 한쪽 입장에서 보는 것을 극복해보려는 입장을 갖는다.
Q2. 처음 성경에 깊이 생각하라는 말이 많다라는 많이 하셨는데, 철학을 전공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원 저자들은 그런 의미의 생각을 쓴 것인지, 텍스트를 박사님의 목적에 따라 사용한 것인지?
읽는 자의 의도로 읽은 것이 맞지만, 의도 없이 성경을 보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원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사유함의 측면에서 보자면 깊이 사유한다는 측면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속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각 구절마다 생각하라라는 의미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Q3 . 철학을 통해 신앙을 표현할 수 있따ㅏ. 폴리스 안에서 나를 표현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파편화된 지식 사회에서 통전적인 지식을 알기 위해 모였다고 생각한다. 고전의 의미를 기능적인 방법론으로 환원시킨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결론적으로 통전적 사고를 관통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이것을 배제하고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가???
철학을 함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은데 대화적으로 하는 철학. 또는 반성철학. 끊임없이 입장을 바꿀 수 있다. 반대자의 입장에서 받는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고민하고 전유하는 사유방식을 갖는 태도를 갖는다면 자신의 생각으로 환원하거나 독선적인 생각을 견제할 수 있지 않을까?
+Q. 강사님이 요구하는 방향이나 의도가 있는지?
강사가 보는 철학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 녹아져 있는데, 이것이 메타적이고 포괄적이라고 판단한 것.
Q 4. 마지막에 그리스도교적인 철학이 가능할까? 그리스도교적인 수학 과학이 가능하다라는 쪽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틀을 만들어놓고 철학의 다른 주제를 그리스도교로 환원시키는 방법은 옳지 않다고 생각. 하지만 신학과 연관이 깊다 보니, 신앙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철학이다라고 말함.
Q5. 기독교 변증과 그리스도교의 철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차이가 없던 시대가 있다. 예를 들어 헤겔도 그리스도교의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있는가?
플랜틴가. (자유의지와 결정론으로 유명해진 사람) 전통적으로 기독교 변증과는 다른 방법으로 예를 들어 이렇게 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비 이성적이 아니라는 식으로 논의를 이끔.
Q6. 오히려 믿음이 정당화되는 것의 싸움. 이성과 신앙이 무엇이 먼저인 것이 아니다라고 했을 때 계속해서 발생하는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칸트가 2가지로 나눈 철학. 이 두가지가 충돌을 느낀다. 인간의 가치나 탁월함. 고귀한 본질에 대해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어느 한 편을 포기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것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양자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부분도 있고, 한편으로 논리적 엄밀성을 추구하면서 대중성을 가져간다고 할 때, 소통한다는 측면에서 대중들도 철학을 할 수 있고, 삶의 문제로 왔을 때 논리적 엄밀성과 갈등은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Q7.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했을 때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자유, 질문자에게는 진리. 철학을 하면서 진리추구의 기능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나?
철학이 진리를 줄 수 있는가? 그것은 모르겠지만 진리를 추구하게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진리를 이해하게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진리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를 모르겠다. 진리가 사실에 입각해 사실적 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인지.
Q8.기독교에 진리. 진리가 객관화되지 않는다면 비 신앙자에게 신앙인이 어떤 답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진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진리에 참여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간주하고 그 안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있다..
Q9.신앙하는 입장에서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서양에서 나왔던 히랍철학에서 바라보고 있는 세계관의 대립을 신앙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모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우리의 신앙의 전통은 계시의 전통. 계시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
Q10. 고통의 문제와 같은 질문에서 철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라이프니츠와 같은 사람이 논리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방향을 줄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에게 의존하여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감내하는 것이 발표자가 추구하는 방향.
Q11. 사유의 훈련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사유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성장하는지?
이성을 사용한 체험. 예를 들어, 책 읽기. 진리의 체험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철학자가 사용했던산책하면서 관조하는 것. 그러나 요즘의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Q12. 신비의 체험이 철학의 집단에서 인정될 수 있는지?
한정되는 것도 있지만 어느정도 인정과 소통이 되기는 한다. 체허되고 공유되는 부분이 철학집단에서도 일반인에게도 공유될 수 있다.
Q13. 사유의 훈련을 텍스트로 하자. 하지만 이것이 훈련되지 않았다. 사유훈련을 하고자 했을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반복해서 죽어라 읽었다. 아무 목적 없이 이해를 위해 읽는 것을 추구하면서. 그렇게 열리는 것을 경험.
-칸트가 말하는 논리적 완전성. 사유의 문법. 이것은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수준은 떨어지지만 무게있는 주제에 대한 질문, 토론, 대화도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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