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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터칼럼]깃발을 든 기독교

category 복연 칼럼 2017. 3. 17. 13:19
깃발을 든 기독교

이원재(독립연구자)


탄핵 인용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되었고, 청와대를 떠나 환하고 밝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며칠간 탄핵 반대 집회에서 몇 사람이 생명을 잃고, 집회 양상은 더욱 격렬하게 변해갔다. 이제 삼성동 집을 중심으로 투쟁하려는 모양이지만, 그 수는 현격히 줄어들었고, 점차 약해질 것이다. 더이상 막연한 동정심이나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집회에 참석하거나 교회를 통해 동원되는 일은 없어질 것 같다. 비록 아직까지 몇몇이 삼성동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다지만.

그래서 이제 지금까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고통스러웠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 한다. 탄핵 반대 집회에 기독교인들이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를 함께 들고 등장한 일이다. 거기에 대형 십자가가 등장한다든가, 십자가 예수 코스프레까지 등장하는 그런 일이다. 너무나 얼토당토 않고, 우스꽝스러워보이기 때문에, 이를 진지하게 마주대하기 보다 비합리적 행동이라고 말하고 비웃거나, 어처구니 없다고 넌더리를 내곤 한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일부 옳지 않은 대형교회 목사들의 선동 때문이라든지, 교묘하고 뻔한 핑계처럼 보이지만 구국기도회 시간과 탄핵반대 시간이 겹쳐서 어쩔 수 없이 참가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빠져나간다. 그럼에도 꽤 오랫동안 기독교인들 특히 노년층 사이에서 탄핵반대와 관련된 온갖 카톡이 돌아다니는 걸 간간이 전해받다 보면, 이런 일련의 일들에 무엇인가 인과관계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얼마 전 한 일간지 칼럼에서 이를 뉴기니의 '카고 컬트'와 비교해서 많은 사람이 읽고 공감을 표했지만, 안타깝게도 며칠 전부터 미군 부대로 사드 시스템의 일부를 실은 '카고'가 내려앉고 있으니 효험이 있는 '카고 컬트'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일이다. 꽤나 많은 다른 일들처럼.

이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가치, 지표 혹은 교리들과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왜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왜 사람들이 이런 선동에 그렇게 쉽게 휘말리는지, 왜 사람들이 이런 행동에 참가하지 않을 때 죄책감도 느끼는지, 왜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일련의 일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록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인정하기 어렵거나 성경적이지 않아 보이고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해도 그렇다. 말하자면 통속 기독교 혹은 현장 기독교 차원에서 통용되는 그런 일에 대한 것 말이다. 나는 여기서 현장의 통속 기독교 즉, actual Christianity에 대해 말하려 한다. 각 교파의 교리적 차이나 성경적 근거나 신앙적 진실성과 무관하게 현장에서 실제로 돌아가는 그런 기독교가 있다. 우리 모두 그런 것이 있음을 잘 알고 있고, 그리고 때론 그런 현장이나 현상에 의지하고 기대거나 혹은 거기에서 생계를 의탁하고, 이익을 얻기도 하니까.

이런 현장 기독교 혹은 통속 기독교 차원에서 볼때,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기가 연결되는 세 지점이 있다. 그것은 선택, 성공, 구원 또는 구원의 확신, 이 세 가지이다. 현장 기독교는 이 세 가지 축을 근간으로 해서 움직인다. 물론 다른 여러가지 것들이 있지만.


선택받은 기독교인, 선민 사상의 표시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가 가장 강렬하게 결합하는 지점. 그것은 '선택'이다. 그 출발점은 미국이다. 기독교를 한국에 전파한 선교사들 중 가장 많은 부류가 미국인이고, 이들은 19세기 후반 미국 특히 기독교를 지배한 한 가지 강력한 이념의 영향 하에 있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라는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본래 이 말은 19세기 후반 미국이 북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장하던 시절, 미국이 북아메리카 전체를 지배하고 개발할 신성한 사명을 가졌다는 이념에서 유래했다. 당연히 이 사상은 미국의 팽창주의와 그를 뒷받침한 기독교 선교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 사상의 출발점은 청교도들이 기반하고 있었던 '언덕 위의 도시' 관념이었으며, 더욱 그 사고방식의 뿌리로 들어가 보면 그것은 바로 선택 사상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실제 미국이 선택받았는지, 실제 미국인들이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 그리고 한국 기독교가 그동안 꾸준히 미국인들이 선택받았다는 사상을 강조하고 내면화했다는 사실이다. 선택받은 미국인들의 신앙을 본받아 한국인들도 선택받은 이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 한국인은 선택받았다는 식의 수사적 표현이 믿음이 되어 간다.

1930년대에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를 때부터, 선택 사상이 그 아래에 깊이 깔려 있었다. 선택 사상을 강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선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구약성경의 핵심사상이자 메시지가 어떻게 이와는 전혀 무관한 현대의 세속국가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지 그 논리적 연결고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은 선택받았다, 즉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한 가지 메시지 만은 아주 강력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의 선택과 현대 세속국가 이스라엘의 선택 사상은 우리가 유태교 신자가 아님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일관성을 가지고 흐르게 된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연장선 상에서 한국이 선택받았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개개인의 한국인 개신교 신자가 선택받았다는 사상과 한국의 선택과는 실상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지만, 이스라엘이 민족 혹은 국가로서 선택받아서, 개개인이 선택받기에 이른 것처럼, 한국도 그런 식으로 한국이 선택받았고, 한국인들이 선택받았다는 연결고리가 형성된다. 이런 주장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근거 없는 대중적 알레고리이고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아직도 널리 퍼지고 있는 것도 역시 분명하다.


선택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한국이 선택받았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그건 무엇보다도 그들의 성공과 번영으로 확인 가능하다. 여기서 오래된 막스 베버 테제가 등장한다. 선택과 구원은 성공과 번영으로 확인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은 그가 선택받고 구원받은 신자임을 확인하게 된다는 칼빈주의에 대한 막스 베버의 설명이다.

미국은 한국에 처음 등장하는 그 순간부터 성공과 번영은 물론 승리의 상징이었다. 처음부터 미국은 일본은 개국하게 했고, 일본 식민지 시절에도 미국인들은 어려움을 겪지 않고 보호받았다. 그 강력해 보이전 제국 일본도 미국에 의해 무너졌으며, 한국 전쟁에서도 미국이 구원자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미국은 번영과 풍요와 성공과 승리의 상징 그 자체였다. 거기에 현실과 동떨어지게도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신화가 덧입혀졌다. 미국이 강력한 기독교 전통 속에 있고, 아직도 기독교인이 다수인 나라이지만, 미국은 실상 기독교적인 원리와 전혀 무관하게 운영되는 세속국가인데도, 이런 사실은 슬쩍 덮어두고 넘어간다. 가끔 백악관에서 기도를 하거나 퇴임한 대통령이 주일학교 선생님만 해도 충분하다.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수많은 미국의 영웅들이 교회를 통해 전파되었다. 그런 영웅담이 실제 그들의 인생과 맞는지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워싱턴, 링컨, 록펠러, 와너메이커, 맥아더, 카터, 레이건, 마침내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미국인과 미국, 기독교와 기독교인, 성공과 번영 그리고 신앙과 기도는 아주 손쉽게 한 덩어리가 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이중적 이야기가 등장한다. 먼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이야기들 모세, 다윗, 솔로몬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때론 과장되고, 때론 미화된다. 현대적인 이해와 과거의 역사가 뒤섞여서 원래 전하려던 메시지들은 사라져버리고, 그저 철기시대의 이 고대왕국이 얼마나 위대했고,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집중된다. 오래전 이 고대왕국이 그 당시 기준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종종 이런 맥락과 무관하게 근대 또는 현대적인 느낌의 강대국인 것처럼 인식상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현대의 세속국가 이스라엘의 성공이 등장한다. 여러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강소국이자 미국의 동맹으로. 거기에 유태인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가 때론 가미된다. 유태인들이 미국의 정관계와 금융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엄청나게 과장된다. 유태계의 영향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 폭과 범위를 정확하게 근거를 들어 말하기는 어렵다. 실상 이런 그럴듯한 이야기들의 기원은 유태인들의 영향력을 과장하여 그들을 차별하고, 탄압하고, 분리하기 위한 것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에 와서 기묘하게 변형된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성공. 여기서는 세 가지 성공이 겹쳐진다. 우선,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엄청난 성공, 즉 세력 확산, 포교의 성공, 기독교 인구의 확대. 불과 100년 그 중에서도 2차 대전 이후에 신·구교를 포함해 이렇게 놀랄만한 기독교의 성장은 세계사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런 정도의 개종은 고대 후기나 중세 초기에 부족장이나 왕의 개종에 의해 부족 전체가 개종하는 일 이후 처음일 것이다. 다음은 한미동맹을 통해 한국이 미국의 보호막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수십 년간의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이다. 종교적 성공, 안보적 성공, 경제적 성공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인 동시에 하나님이 한국을 선택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전도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더 열심히 헌금을 내고, 더 열심히 교회건물을 지어야 한다. 즉, 더욱 신앙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한국, 미국,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일치한다. 그들은 선택받았다. 그 증거는 그들의 성공과 번영이다.


구원, 선택에 근거하고, 성공으로 확인되는.

선택과 번영 즉 성공을 연결하는 고리, 그 가장 중요한 고리가 바로 구원이다. 구원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증거로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구원과 성공과 번영의 관계가 역전된다. 성공과 번영은 처음에는 선택받고, 구원받은 증거이지만, 이제는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정확히 말하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공과 번영은 계속되어야 한다. 성공과 번영에서 낙오하면 다시 말해서 패배하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낙오로 흔히 인식된다. 우리는 이렇게 수근거린다. '뭘 잘못했길래.'

물론 구원은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확인할 다른 방법도 사실은 없다. 그렇다보니 많은 기독교 교파들은 구원을 확인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전례, 즉 의식을 강조하거나, 교회생활 혹은 종교활동에 대한 열정적인 참여를 강조하기도 한다. 선행과 희생을 강조하고, 또 한편 선교나 종교적인 사업에 대한 헌신을 강조한다. 그래서 무리해서 헌금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들은 자기 신앙의 확인과정, 다시 말하면 자기 구원의 확인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자기 개인 내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만족과 자기 확인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즉 교인들 사이에서, 또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가장 좋은 수단은 바로 성공과 번영이다. 사업, 직장, 결혼, 가정의 여러가지 일에서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한 증거요,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기로 한 증거로 아주 쉽게 받아들여 진다. 물론 이런 일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럴 때도, 그런 비판은 이런 성공을 받아들이거나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신앙적 태도를 한 번 더 점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인 성향이 이끌어내는 강박

다시 앞서의 선택 이론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통속적 인식에 따르면 선택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집단적이기도 하며, 민족적이기도 하고, 국가적이기도 하다. 내가 선택받았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런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선택받은 집단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성공과 번영 역시 개인적이기도 하고 집단적이거나 국가적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성공이나 번영은 실상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닌가. 고시에 패스하거나 사업에 성공하는 일이 그리 흔한가. 성공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들과 동질적인 집단에 속하면, 그 집단적 성공이 자신이 것인 것처럼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강남의 대형교회의 젊은 교인들 중에 꽤 먼곳에서 다니면서, 교회 일에 애써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소속감을 얻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구원 역시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 국가적, 민족적이기도 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수사적 표현을 아주 쉽게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유럽이 쇠락하거나 미국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더 이상 이들이 신앙에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해석이다. 동성결혼을 허락하거나, 이슬람 문화와 종교를 허락하면서, 신앙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식의 해석이다. 그러나 언제든 이들이 회개하면 회복할 수 있다는 단서를 잊지 않는다. 이스라엘 국가의 세속적 측면은 대다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혹은 유태인의 성공신화는 너무나 미화되어 잘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부터 모세오경(토라)을 암기해야 한다든가 하는 식의 온갖 속설의 짬뽕인 이스라엘 교육법이 오늘도 '토라' 나 '탈무드'의 신화와 함께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상 또 하나의 사교육 형태로 상업화되어 몇몇의 돈벌이 수단이 되기도 한다. 거기에 더 나아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선교하고,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면 구원의 역사가 완성된다는 식의 시한부 종말론까지 판을 쳐서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분쟁지역에서 기이한 행진을 하기에 이른다.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으로 오늘의 번영과 성공을 이룩한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의 국민들과 백성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이 구원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선택받은 나라인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특히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은 미국이 허용하고 미국이 관리하는 상황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미국이 햇볕정책을 반대할 때, 이를 추진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한반도에 무슨 일만 있으면 미국이 뭐라 말하는 지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 북한이 스스로 무너진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렇게 믿고 기도한다. 그리고 이 선택과 구원의 상징이자 결과인 성공과 번영을 이끌어낸 박정희와 그 후계자인 박근혜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그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은 그 자체로 확실한 구원의 반석을 흔드는 일이다. 반대로 집회에 나아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일은 때로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는 일도 실상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표출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로 나가서 외치고, 카톡을 돌려보며 안타까워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나라, 그래서 구원받은 나라, 그 결과이자 증거로 성공하고 번영하는 나라를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동시에 그와 다른 생각을 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배제하거나 교화 혹은 회심시키려 하는 것이다.


종교 엘리트주의 한계와 현장 기독교의 실상

이런 일련의 사고방식이나 인식은 미신적이라거나 신학에 맞지 않는다고 간단하게 배척해 버리기에는 다소 어려운 지점을 가지고 있다. 당장 이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태극기, 성조기 등을 흔드는 일은 본인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도구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신앙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설득하는 일은 의외로 쉬울 수도 있다.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태극기나 성조기 대신 무엇인가를 채워주어야 한다. 무엇이라도 손에 들려주어야 한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특히 얼마 전까지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붙들고, 열광하던 사람에게는 그 허전함을 채워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게 은사집회에서 체험하는 일종의 신비적 경험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의 확연한 증거이든, 그것이 아니면 맞서 싸울 새로운 적이든.
신비적 체험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의 확연한 증거이든.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연결되어 있다. 바로 신앙이란 개인적인가 혹은 집단적인가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의 개인적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을 교리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의 모임 또는 집단으로 이해한다. 그렇기에 원칙적으로 교회는 선택 가능하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의 편의를 위해, 혹은 개인의 신앙생활의 안전을 위해 교회 또는 다른 단체 활동을 통해서 신앙을 키워나가고, 신앙을 유지 보존한다.

분명히 이러한 교리와 이론에 기반하여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성경과 교리에 대한 이해만으로 충분해하며 자족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종교 엘리트'라고 부르겠다. 이런 사람들은 홀로 있어도 족하고, 모이면 더 즐겁고 힘이 있다. 그러나 흔히 성직자 또는 직업 종교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조차 이런 단계에 이르른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직업 종교인들과 평신도들은 종교를 그러니까 신앙을 교회와 단체 안에서 경험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하고, 타인과 함께 동일한 신앙활동을 해나감으로써 종교 또는 신앙에 대해서 배우며 믿음 또는 종교적 신념을 깊게 하고, 종교를 가진 사람 즉, 신앙인으로 살아나가게 된다. 실제의 종교 활동은 집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집단과 단체 즉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활동 또는 신앙 생활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기 보다는 실상 집단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현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세워가는 일은 현대 교회에서는 그리고 대형화될수록 불가능에 가깝다. 작은 교회라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집단 중심의 신앙 형태가 고착화된다. 우리 교회 또는 단체는 다르다. 우리 교회 또는 단체는 참된 말씀이 있고, 참된 구원이 있다는 식의 논리로 아주 쉽게 넘어간다. 종교 활동이나 신앙생활의 핵심인 구원이 단체적 또는 집단적이라고 아주 쉽게 생각하게 한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확인하기 어려운 구원 문제를 집단을 통해 확인하면서 차라리 안심한다. 구원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 즉 교회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신앙생활의 기준을 맞추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종교활동 혹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그들보다 나은 종교활동 혹은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 종교 신념의 집단화, 즉 구원의 집단화는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구원이란 절대로 집단적이지 않지만, 한 사람, 한 개인의 일생의 신앙은 실상 어떤 종교 단체 혹은 집단에 소속되는 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종교 엘리트뿐이다. 무교회주의는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없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일을 신앙으로 결부시키는 사람들을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국가주의가 약화되면 자연스럽게 줄어들 일이기도 하고, 세대가 바뀌면 없어질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현장의 기독교가 집단적 구원과 개인 구원 사이를 헤매면서 방황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을 준거로 삼아 자신의 신앙생활이나 신앙행위의 척도를 삼으려 할 것이고 그 대상이 성공하고 번영하면 할 수록 그 준거는 강력한 신앙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종교 엘리트들에게만 가능한 이성적·지성적 신앙이 아니라, 평신도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통속 기독교 현장 기독교 차원에서 가능한 개인적 신앙, 개인 구원의 집단화 현상에 대한 인식. 그 한계에 대한 엄격한 규명이 이루어지고, 집단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집단의 성격과 그 위치를 규명하는 일들이 근원적으로 성찰되지 않으면, 이런 일은 반복될 뿐 아니라, 얼마든지 악화될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최악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