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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

category 복연 파일 2014. 11. 19. 16:43

 

 

2014

복연세미나 발표회

 

 

 

아물지않은

한국전쟁

 

 

 

 


복연발표회 자료집(최종).pdf

 

 

 

 

 

 

2014 2 26일 오후 7

IVF 중앙회관 좋은땅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인사말

 

 

 

‘한국전쟁’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난 가을부터 우리는 많이 놀랬습니다.

전쟁 자체를 너무 모르고 있었고 그 상처가 상상 이상으로 깊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회개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공부로 끝낼 일이 아니고,

우리도 평화의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확신이 깊어졌습니다.

 

복연 세미나팀의 ‘한국전쟁’ 공부 결과를 나누는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20142

IVF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소장 이 강 일

 

 

 

 

2014년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한국전쟁] 세미나팀 발표회

제 목 : 아물지 않는 한국전쟁

목 적 : 현재 한국사회의 갈등의 직접적 뿌리가 한국전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참상에 공감하며,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모색한다.

일 시 :  226일 수요일 저녁 7-930

장 소 :  IVF 중앙회관 지하 좋은 땅

순 서

      1. 전쟁경과와 증언                    - 세미나팀

2. 슬픔과 희망의 노래  - 심소라(한예종)

3. 책임과 평화의길                     - 강성호(성대 사학과 석사), 윤환철(한반도 평화연구원 국장)

4. 평화의기도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를 소개합니다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는 IVF 사역 연구원 산하 캠퍼스사역연구소,

일상생활사역연구소와 함께 2007년에 시작한 연구모임입니다.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의 정체성, 현황, 전망 등을 한자리에서 연구하고 섬기고자 하는 취지로 모였습니다. IVF를 넘어서 모든 복음주의 운동의 네트웍이 되어 섬기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실행 중인 학술모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연 포럼

 1, 한국복음주의운동에 도움이 되는 주제를 선정하여 포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복연 세미나

매년 두 권씩, 서구권과 우리나라 복음주의 신학, 역사, 운동 등을 정리하기 위한 책읽기 모임입니다. (진행 중)

 

 

 

 

 

현재 연구소는 홍대입구 한국기독학생회(IVF)중앙회관 4층 사역연구원에 있습니다.

Facebook : www.facbook.com/ivfiem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의 설립 취지

 

 지금 한국 기독교계는 전반적인 위기상황 속에 있음을 진지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상황을 인식할 뿐, 실제로 해결하려고 나서는 곳은 찾기 힘듭니다. 대개는 소속 단체의 현상유지에 더 급급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는 전체의 유익을 위해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IVF는 캠퍼스 복음화에 온 역량을 쏟아왔습니다. 이제는 그 역량을 한국기독교계 전체를 위해서 나눌 때가 되었습니다. IVF 사역연구소 산하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가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첫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오신 우리의 주님을 따라, 그리고 복음주의 운동의 초교파적 연합정신이라는 전통을 계승하여 누군가는 해야할 바로 그 사역을 시작하겠습니다.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의 4대 비전

 

1.   연구 : 복음주의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면서 새롭게 전개되는 국내, 외 복음주의 신학과 운동 및 일반 학문의 동향을 바르게 연구, 정리하여 한국 기독교계의 씽크탱크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2.   연합 : 흩어져 있는 복음주의 운동의 역량을 한데 모으는 중심 네트웍이 되어 학문연구와 실천현장이 서로 소통하도록 돕겠습니다.

 

3.   지원 : 복음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도록 관련 연구자 및 운동가를 발굴하고 지원할 것입니다.

 

4.   교육 : 학문연구자들과 현장운동가들 뿐만 아니라 평신도 대중을 위해 복음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연구 성과물을 보급할 것입니다.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의 4대 실행방안

 

1.   연구 : 복음주의 운동과 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매년 특별 연구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그 성과를 담은 연구지를 발간하여, 한국 기독교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자료가 되게 하겠습니다.

 

2.   연합 : 매년 복음주의 포럼을 개최하여 연구자의 성과를 발표하게 하고, 관련 연구자와 운동가들의 네트웍을 형성하겠습니다.

 

3.   지원 : 복음주의 관련 연구자들을 발굴하고 선정하여 장학금 또는 연구비 등을 지원하겠습니다.

 

4.   교육 : 장래에 복음주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내다보면서, 각 학문 분과 연구팀을 가동하여 우선적으로 복음주의운동입문서를 시작으로 각 학문 분야별로 신학, 인문, 사회, 과학 교양 관련 교과서를 제작해 나갈 것입니다.

 

 

 

 

 

 

 

 

 

 

 

 

 

 

 

 

 

 

 

 

 

 

 

 

 

 

 

 

 

 

 

 

 

 

 

 

 

 

 

 

 

목차

 

 

인사말                      3

연구소 소개             4

                                   목차                           7

 

 

전쟁경과와 증언

 

한국전쟁의 경과와 내용 / 이혜민   8

전쟁 당시 발견한 편지    / 이수진   14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 /      17

 

슬픔과 희망의 노래          / 심소라   20

 

책임과 평화의 길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 문제                  / 강성호   22

은폐된 화해의 역량                                  / 윤환철   31

 

평화의 기도                   / 장원세   34

한국전쟁 퀴즈                     / 유태완   37

 

 

  추천도서               40

 

 

 

 

 

 

전쟁의 경과와 증언 Ⅰ

한국전쟁의 경과

이혜민 (복연세미나팀)

 

1. 한국전쟁의 전개[1]

 

* 1950

625() 새벽 4, 전쟁 발발

627() 대한민국 정부, 대전 이전/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한반도에 군대 파견 결의

628() 북한군, 서울 점령

716() 금강 방어선 붕괴/정부, 대구로 이전

818() 정부 부산 이전

9월  2() 북한군, 낙동강 일대에서 총공격 개시

915()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 탈환

929() 대한민국 정부, 서울로 귀환

101() 한국군, 38선 돌파

1019() 유엔군, 평양 점령

1025() 중공군 참전

1127() 북동전선의 유엔군, 후퇴

1128() 중부전선의 유엔군, 후퇴

12월  5() 공산군, 평양점령

1230() 유엔군, 모든 전선에서 38선 이남으로 철수

 

 

* 1951

1월  4() 유엔군 서울 철수(1.4 후퇴)

314() 국군, 서울 재탈환

324() 유엔군, 38선 넘어 북진

6월  5() 한국 국회, 정전 반대 결의문 채택(‘완전 통일 없는 휴전 반대’)

623() 말리크 소련 대표 유엔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전회담 제안

7월  1() 공산군 정전회담 제안 수락

7월  3() 유엔군 정전회담 수락

710() 정전회담 제1

711() 정전회담 제2

712() 정전회담, 기자단의 개성 출입 문제로 중단

715() 정전회담 재개

716() 미 공군 개전 이후 최대의 폭격

825() 미 하원 군사위원회, 정전회담 결렬되면 원자폭탄 사용하라고 언명

921() 판문점으로 회담장소 이동

1110() 정전회담 군사경계선 문제에 관해 서로 제안 제시

 

 

* 1953

411() 유엔 공산, 양측 상병포로교환 협정 정식 조인/이승만, 한국군 단독 북진 선언

420() 상병포로 교환 개시, 427일까지 8차에 걸쳐 교환

524() 정부, 정전 반대 성명서 발표

6월  1() 이승만 정전성립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하면 정전반대 철회 제의

6월  8()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 조인

611() 이승만, 정전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성명

612() 중부, 동부 전선에서 고지전투 격화

7월  9() 동부, 서부 전선에서 고지전투 계속

725() 고지 전투 계속

726() 8군 사령관, 이승만에게 정전협정 성립 통고

727() 8군 사령관, 9개 국어 방송으로 오후 10시에 정전명령 발표

/군사분계선 발표/전 전선, 오후 10시를 기해 전투 중지

 

 

 

 

 

 

 

 

 

 

 

 

 

 

 

2. 한국전쟁 사상자 수[2]

 

<대한민국> 230만명

 

 

 

 

 

 

 

 

 

군인 987000                                민간인 140만명

 

부상

1,594,000


사망

406,000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92만명

                   군인 총 92만명                                   민간인 총 200만명

 

* 남북한을 합친 한국민의 인명 손실은 520만 명 선, 특히 비전투요원(민간인)의 인적 손실이 컸다는 점이 한국전쟁의 비참성을 극명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초대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1951년의 의회 청문회에서의 증언

“평생을 전쟁 속에서 보낸 본관과 같은 군인에게조차 이러한 비참함은 처음이어서 무수한 시체를 보았을 때 구토하고 말았다.

- 유엔군 : 15만명

- 중국 : 90만명

참고 : 1차 세계대전 사상자(32524560), 2차 세계대전 사상자(5000만명)

 

 

2. 한국전쟁에 대한 의문들

 

(1) 해방 후에 한반도는 분단될 수 밖에 없었는가?

한국은 드문 단일 민족 국가이다. 오천년이 넘는 세월을 한 혈통으로 살아온 한반도의 한민족이 갑자기 해방 후 국가 건설 과정에서 단 순간에 이념 갈등으로 분단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체제로 인해 내부에서 아무리 한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해방 이후 좌익과 우익은 국가 건설 과정에서의 주도권을 잡고자 각자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 관계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여운형의 좌우합작위원회는 성사되기 어려웠으며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제 입맛에 맞춰 이끌어가려고 하였다. , 좌우익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 관계 관철보다 통합된 국가를 세우는 것에 협력하였다면 세계 체제가 냉전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국가를 수립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단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오히려 냉전 체제가 격화된 1955년에 통일을 이루었다.) 한국 전쟁으로 수많은 학살과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양국의 국민들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였고 분단은 전쟁으로 고착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 왜 한국 전쟁의 명칭은 다양한가? 왜 날짜로 전쟁을 기억하는가?

(조국해방전쟁, 6.25전쟁, 6.25사변, 6.25동란, 한국전쟁...)

 북한은 한국전쟁을 미국을 격퇴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규정한다(조국해방전쟁). 따라서 조국해방전쟁은 노골적으로 북한의 정치적 입장이 담긴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남한의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 공산당이 1950625일 불법 ‘남침’ 하여 민족 전체를 고통에 빠뜨린 사건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6.25’ 가 들어간 명칭은 발발 일자를 전쟁 이름에 넣어 전쟁의 전체상을 왜곡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외국의 공식 문서나 학술 논문들은 한국 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한국인에게는 타지에서 전쟁이 일어난 듯한 인상을 주어 거북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정치적 중립성을 가장 잘 담보한 용어이기에 한국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3) 누가, 왜 전쟁을 먼저 일으켰는가?

 한국전쟁은 냉전 시기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냉전이자 내전이며 동시에 세계 주요 강대국이 전쟁 행위자로 참여한 전면전의 성격을 지닌 매우 복잡한 전쟁이다. 따라서 원인과 기원을 두고 학계 내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한반도 내부(미시적 관점)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에 초점을 맞춘 북침설, 남침설 그리고 미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을 침략하도록 유도했다는 남침유도설, 왜 한국 전쟁이 발발했는지에 초점을 맞춘 외적 기원론(외인론), 내적 기원론(내인론) 및 절충주의 등이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소련과 북한책임론을 주장하며 수정주의자들은 미국의 책임을 강조한다(제한적 북침설, 남침유도설). 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내부 문서가 공개되면서 학자들 중 북한과 소련, 중국의 세계혁명을 강조하는데 이는 한반도 내부의 정치 상황을 간과하고 미국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한계가 있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 제3의 길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다양하여 하나의 이론으로 묶어내기는 어려우나 90년대 이후에 떠오는 ‘구성주의’ 가 한국전쟁을 설명하는 또 다른 접근법으로 떠오른다. 구성주의는 탈냉전 이후 국제체제와 같은 구조를 강조하는 신현실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다. 구성주의는 구조의 인과적 효과가 아닌 구성적 효과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현실주의와 차별된다. 즉 구성주의에 따르면 구조만이 일방적으로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며 구조와 행위자는 상호구성한다. 구성주의의 관점에서 냉전이라는 국제 체제만을 강조하는 오류를 넘어서서 당시 시대 상황에서 남북한 지도자, 강대국의 해위를 통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틸리(Tilly)라는 학자는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만든다(war made the state and the state made war).” 라고 주장하였다. 한국 전쟁을 생각할 때 우리의 주된 인식은 ‘평화로운 남한을 1950625일 갑작스레 북한이 침략하였고 미국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였다’ 는 것인데 분명한 것은 남북한 국가 지도자들 모두 한국 전쟁으로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공고히 하였고 분단국가를 고착화하였다는 점이다. 북한은 조국해방을 외쳤고 남한의 이승만 역시 반공주의를 토대로 한 강력한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커밍스나 메릴과 같은 한국 전쟁 연구가들은 19506.25 이후의 한국 전쟁은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1945년 이후 국가 건설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의 연장선이었다고 보며 한국 전쟁 발발 이전까지 남북한에서는 정치폭력과 좌우대립에 의해 1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당시 남한 지도자들의 평화로운 남한 사회를 북한이 기습 공격하여 비극적인 분단 국가를 낳았다는 주장은 정치적 왜곡을 담고 있으며 한국 전쟁의 반쪽만 분석하는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전쟁론의 대가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의도를 따르는 것” 이라고 말했다.

 

(4) 왜 전쟁은 3년이나 걸렸는가?

1951년 봄, 서울을 2번이나 점령, 탈환하는 과정을 거친 끝에 전쟁 9개월 만에 양측의 전선은 38선 근처로 되돌아오지만 그 후에도 2년 동안이나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 정전협정은 소련 말리크 대표가 51623일 공식적으로 유엔에서 제안하고 7월 공산군과 유엔군이 이를 수락하면서 710일 시작한다. 그러나 53727일까지 본회의 159회를 비롯한 총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의를 연 끝에 공식화된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남북의 이해관계가 걸린 탓에 전쟁은 정전회담 시작 후에도 2년이나 걸린 셈이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정전을 반대하며 전쟁 단독 불사를 주장하지만 1953712일 휴전 조건 중 하나였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미국이 동의하면서 휴전에 합의한다. 포로교환 문제, 휴전감시 방법 및 기능, 군사분계선 설정, 외국 군대 철수 문제, 각국 정부에 대한 권고 등이 정전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정전 협정이 맺어지는 2년 동안 38선 근처의 고지 전선에는 전투가 계속되고 수많은 군인들이 죽는다. 영화 ‘고지전’ 은 이 2년 동안의 고지전투를 모티브로 담은 영화이다.

 

(5) 왜 남한 정부, 군인들이 남한의 양민들을 학살하였는가?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등은 남한 정부와 군인 즉, 국가 권력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적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마구잡이로 집단처형한 자의적 학살 사건이다. 1950년 겨울 잔류한 인민군 및 빨치산과 국군 간의 산발적인 전투가 전개되던 때에 국군에 의한 학살이 많이 발생하였는데 경남 산청, 거창, 함양 지역 및 전남 함평과 전북 남원 그리고 순창 등지에 주둔한 국군들은 빨치산과 인민군이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고 없애버리는 일명 ‘초토화 작전’ 을 쓴다. 또한 점령과 탈환을 2번이나 반복한 이남 지역에서는 피난가지 않거나 못한 양민들을 ‘빨갱이’ 의 가능성을 이유로 학살한다. 적에게 협력한 인사나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민간인들은 모조리 적으로 몰아 처벌한 것이다.

 

(6) 왜 한국전쟁은 다른 전쟁과 비교해보았을 때 유독 민간인 사상자 비율이 높은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남한 사회에서는 국군이나 남한 정부가 민간인들을 ‘빨갱이’ 의 가능성을 이유로 무차별 학살하였다. 북한의 경우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높았다. 195011월 초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맥아더 장군은 115일 ‘초토화정책(Scorched Earth Policy)’ 을 명령한다. 2차 대전 이후로 워싱턴의 정밀폭격정책에 따라 금지해오던 B-29기의 소이탄 투하가 한반도에서는 현실화되었고 1950년 겨울 소이탄으로 인한 최악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소이탄을 투하한 후에 불을 끄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을 저공비행 기총소사로 조직적으로 사살하는 도시에 대한 완전 소각이 자행되었다.

 

 

 


Tilly, Charles, 1975. "Reflections on the History of European State-Making," in The Formation of National States in Western Europ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next/populationPolicy/policy1950.do

군사문제연구소, 1991. [한국전쟁일지]

김동춘, 2006. [전쟁과 사회], 돌베개

김태우, 2013.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박태균, 2005. [한국전쟁], 책과함께

유완식, 김태서, 1985. [북한 30년사], 현대경제일보사

커밍스, 브루스, 1986.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쟁의 경과와 증언 Ⅱ

전쟁 당시 발견한 편지1

 

이수진 (복연세미나팀)

 

 

1.      동리 청년들은 다 군대에 나가고

어머니 모시고 거둬들이는 가을 곡식

 

오빠에게 드리는 편지

 

화살같이 달리는 세월은 무더운 여름날은 다 지나가고 산천초목이 녹색을 띄는 가을철을 맞이하였습니다. 소식 몰라 궁금하던 중 찬섭 오라반에게 보내는 편지와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반가히 받아보고, 뒤이어 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10 12일에 받아본 즉 적은 금액의 돈도 받고 있고 몸도 무사하다 하니 멀리 있는 우리로서는 대단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형님은 몸 푼 이후 몸이 펴니 않아서 아직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학교는 전시 태세로 인하여 증산 고급중학교는 인민군이 주둔하고 두만 인민학교로 이동한 이후 지금은 학교를 정지 중이어서 형님은 아직 집에 오지 않아서도 모친님 모시고 가을 곡식을 거둬들이나…. (중략)

 

흉년이 들어 농촌에서도 양식이 풍부치 못하여 배급이나 타서 좀 보태먹을까 생각하였던 바, 리 인민위원회에서 집에는 농사를 많이 해서 그런지 삼촌네도 이제는 배급을 정지하고 맞형님네만이 배급을 타고 있으며 배급 타는 집도 다 정지하고 이제는 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가족의 배급은 가을에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봄에 가서나 준다고 합니다. (중략)

 

동리 청년들은 다 군대에 나가고, 찬섭 오라반과 군하는 제일 나중에 음력 8 20일에 군대에 나가고서는 편지가 없습니다. 해당자라고는 창몽 위원장과 창순이 아주반은 병으로 진단서가 있어 나가지 않고 동리 청년이라고는 꿈에도 볼 수 없습니다. (중략) 군대에 나간 동리 청년들은 거의 부상 당했다고 하는데 도섭이는 왼손의 부상으로 인하여 지금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중략) 그만 펜을 놓습니다. .

 

1950 10 14일 부송

 

 

 

 

2.      보내는 이 : 중화구 동두면 선메리 131번지 김턴식,

받는 이   : 서울특별시 내무부 교통지위대 1소대 2분대 김선기 아저씨 앞

 

턴식이 아버지에 편지에 소식을 압니다.

턴식이 아버지는 우리 소식을 몰라니,

가슴에서는 쓸쓸하게습니다.

그리고, 턴식이는 잘자라 남니다.

해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950 9 15

 

 

 

3.      강득화(조선인민군 우편함 4630)

 

조국을 위하여서 선봉대로 나선 봉석이 아버지는 그동안 편하지요.

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아보았읍니다.

(중략) 그리고 나는 편지를 바다 보고 영광으로 생각하면서도 한긋 생각하면 누물을 흘의면서 편지 보았읍니다. 그리 아를시오. 그리 나는 당신의 몸조심하기를 특기 부타합니다.

그리고 나는 칠월이 다처오면는 면해를 가계스니 봉석이 아버지는 요구되 것은 부타하시오.

(중략) 나의 생각을 해줄 사람 없습니다. 당신 한나 받견 없읍니다. 해답 발이 해주시요."

 

1950 6 8일 홍은애

자강도 만포구 고산면 춘산리 제8

 

 

 

4.      보내는 이 : 평안남도 대동군 순안면 사직리에 사는 딸 영신

받는 이   : 평양특별시 도시경영성의 식당 경리부에서 일하는 아버지 남종렬

 

그리운 아버지에게

아버지 그 동안 몸 무사히 계십니까?

순안 식구들은 아무 탈 없이 지내오니 안심하십시요. 그런데 순안에서는 전기 관계상 쌀을 찧지 못하여서 쌀값이 1000원까지 오를지 모릅니다. 지금은 백미 950원이고 좁쌀 850원입니다. 그러니 못 가져온다 하여도 배급 쌀을 절대로 팔지 말아야 합니다. 언니가 있는 광정국 곁에 집이 있다는데 아버지가 의논하여서 어떻게 가든지 있든지 해결해주십시요. 아무쪼록 배급 탄 것을 팔지 마십시요.

순안도 매일 놈들의 폭격은 심해지며 또 사천에도 매일 오는데 여기는 방공호도 안전한 것이 없으니 안심 못하겠습니다. (중략) 종종 회답.

영신 올림

 

보충말 지금 살고 있는 사천에서도 집이 없어 농촌 집 윗방에 들어 있었는데, 곡식을 들이겠다고 방을 내라고 하는데 집이 없어서 평양으로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순안서 약 시오리 되는 다멍골이라는 촌으로 갈는지 지금 공중에 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쌀도 매일매일 비싸집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절대로 쌀을 파시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오시겠다고 하여서 우리는 5일 후부터 매일 기다렸습니다. 우리 있는 곳도 밤이나 낮이나 매일 떨고 있습니다.

 

1950 10 10

 

 

 

 

 

 

 

 

 

 

 

 

 

 

 

 

 

 


[1] 이홍환 엮음,『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2012, 삼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북한 점령지에서 북한의 공문서를 포함해 적지 않은 양의 '북의 기록'을 노획했다. 이 노획 문서들은 도쿄의 연합군 극동군사령부를 거쳐 미 워싱턴의 연방기록물 보관소로 이관되었다. 이 노획 문서 중에는 평양중앙우체국에서 노획한 개인 편지 1200여 통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동생이 중국 길림성(지린성) 집의 형에게 쓴 편지, 평남 안주 고향집의 아내가 '해방구'인 서울에 내려가 있는 남편에게 쓴 편지, 인민군 나간 아버지가 평남 용강 고향의 아들에게 '이제는 네가 오마니와 토론해 집안일을 다 해 나아가라'고 부탁한 편지도 있다. 고향을 떠나 자강도 만포의 직장에 가 있는 남편은 황해도 서흥의 고향집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몸 풀 날이 다 되었는데 안녕하신지'를 묻는다. 편지 대부분이 전쟁 직후인 10월에 쓰인 것들이다.                                            –프레시안 기사(2012 10 19)

전쟁의 경과와 증언 Ⅲ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1

 

전전 (복연세미나팀)

 

“4부 골로간 사람들의 역사중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과 함께 급속히 전선이 남하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힌 군경은 이른바 잠재적 빨갱이로 예단하고 좌익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지역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 (중략).. 진양군 정촌면의 보도연맹으로 학살에서 생환한 정영식은 그 때를 회상했다.

 

지서에서 야경꾼이 와 보도연맹 가입자 모이라고 해. 거기 가면 보련 탈퇴해줄 거라고 오라고 해. 우리는 모르고 갔어.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했어. 그런데 모이니까 우짠 판인지 쏴 죽이는 판이여. … 경찰들이 서 있어 송장 밑에 누워 있다가 해가 어둘 무렵에 밑으로 내려 왔다. 총상을 입어 걷지도 못하고 손으로 땅을 짚으며 궁둥이를 끌면서 갔지                        p113

     

 내가 갈 적에 가막소에 5백 몇 십 명이 갇혀 있었다. 가막소에는 방이 열 몇 개가 있었는데, 우리가 가니까 방이 꽉 차 가막소 유도실에다 가뒀다. 거기서 열하루를 굶고 지냈어. 그렇게 하니 몸에 힘이 있나. 생각하면 눈물이 철철 난다. … 한 차에 백여명씩 둘씩 묶어 차에다 밀어 붙였다. 버스가 꽉 차면 배 몇 십 명이 되는데 한 차에 순사 7명이 탔어. 산골짜기로 끌고가 눞여놓고 쐈다.                                                                                p115

 

군경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보도연맹원들은 세상이 바뀌자 피학살자에서 학살자로 변신했다.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학살의 주체가 바뀐 것이다. 이들은 인민군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미군과 군경 및 우익 인사를 처단하기 시작했다.                                                         – p120

 

비록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김이권은 보도연맹원 학살 못지 않게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 (중략) … 9 2일 오전 7시경 반지리 자위대 부대장이던 박명조는 김이권 외 5명을 인민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체포하여 취조했다. … (중략)… 와병으로 보행이 어려운 김이권은 자위대원의 감시 아래 장남의 등에 업혀 처형장으로 끌려가 참새미골재에서 총살되었다. 아들이 병든 아버지를 업고 총살 집행 현장으로 가는 모습은 잔인한 보복과 증오가 낳은 비극이었다.

-p122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인민재판에 의한 적대 세력 제거보다 더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중략)… 미군기의 폭격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진주중학교 교무주임이던 정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율했다.

8 22일 아침 5시경에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다. 전투기 두 대와 경폭격기 한 대의 내습이다. 두 대는 양쪽에서 교대로 우리들 있는 곳에 한 시간 계속해서 밭 갈듯이 기총 소사를 퍼부었고, 경폭격기는 봉래교회를 불 지르고 말았다. 방 한 쪽에 엎치고 있으니 총소리, 불타는 소리 비명소리 등등 정말 염라대왕이 지켜보는 지옥의 아비규환이었다.                                           – p124

 

인민군은 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밀어붙일 때까지만 해도 승전에 대한 확신과 승리자로서 넉넉한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고 패전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상황이 짙어지자 공산주의적 품성과 관용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인민군은 전세가 악화되자 점령지에서 징집한 의용군을 총알받이로 세웠을 뿐 아니라 부상자도 인민군 정규병만 후송하고 의용군 부상자는 그 자리에 방치하는 등 극도의 비정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 p119

 

이렇게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비극의 소용돌이가 잔혹한 죽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피해가기 어려운 사건들로 채워져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비단 누가 얼마나 더 죽였고, 어느 쪽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한다.

 

 

 

 

 

 

 

 

 

 

 

1  한국구술사학회,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2011.

이 책은 한국 전쟁이라는 같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각기 다른 장소와 삶의 배경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모양의 아픔과 고통을 경험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서 가늠할 수 없는 비극의 무게들이 우리네의 삶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었는지 확인할 수 있게끔 한다.

 끊어진 한강다리 뒤에 남겨진 사람들, 떠나야 할 곳이 없어 서울에 남아야 했던 서울 토박이. 분단선을 가운데 두고 친지끼리 왕래가 끊어져야 했던 철원 사람들,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었던 현장을 지켜보았던 이들, 빨치산, 의용군, 미망인, 부역죄 가족 등의 이름으로 살아내어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어느 학도병의 편지

 

1950 8 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 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壽衣(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壽衣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1950 8월 포항 전투 당시 어느 학도병의 수첩에서

슬픔과 희망의 노래

(1) 적벽가 中 적벽화전

 

판소리 : 심소라 / 장구 : 백소망

 

<아니리>

정욱이 여짜오되군량 실은 배량이면 선체가 온중할 터인디, 둥덩실 높이 떠 요요하고 범유하니, 만일 간계있을진댄 그난 어찌 회피하오리까?” 조조 이 말에 의심이 나서, “그래? 그래, 그렇겄다. 네 말이 당연하니 문빙불러 방색하라!” 문빙이 우뚝 나서, “저기 오는 배 어디 배요? 승상님 영전에는 진 안을 들어서지 말랍신다!”

 

<자진모리>

이 말이 지듯 마듯 뜻밖에 살 한 개가 피그르르르, 문빙 맞아 떨어지고, 황개 화전 이십척 거화포 승기전과 떼떼떼 나발 소리, 두리둥둥 뇌고 치며, 번개같이 달려들어 한 번에 불어 버썩, 천지가 떠그르르르르 강산이 무너지고, 두 번에 불이 버썩 우주가 바뀌난 듯, 세 번을 불로 치니 화렴이 중천, 풍성은 우루루루루 , 물결은 출렁, 전선 뒤뚱, 돗대 와직끈 용총 활대노 사욱대 우비 삼팔다리 조판 행장 망어 갑부대가 물에 가 풍! 기치 펄펄, 장막 쪽쪽, 화전궁전 당파창과 깨어진 퉁노구 거말장 마람쇠 나발 큰북 징 꽹과리 왱기렁 쨍기렁 와그르르 철철, 산산이 깨어져서 풍파강상에 화광이 훨훨, 수만전선이 간 곳 없고 적벽강이 들끓으니, 불빛이 난리가 아니냐? 가련할 손 백만군병은 날도 뛰도 오도 가도 오미락 꼼짝달싹 못하고, 숨막히고 기맥히고 살도 맞고 창에도 찔려 앉어 죽고, 서서 죽고, 웃다 울다 죽고, 밟혀 죽고, 맞어 죽고, 애타 죽고, 성내 죽고, 덜렁거리다 죽고, 복장 덜컥 살에 맞아 물에가 풍! 빠져 죽고, 바서저 죽고, 찢어져 죽고, 중하게 죽고, 우습게 죽고, 무섭게 눈 빠져 써 빠져 등 터져 오사 급사 몰사 악사하야 다리도 직신 부러져 죽고, 죽어 보느라고 죽고, 무단히 죽고, 함부로 덤부로 죽고, 떽떼그르르 궁글다 아뿔싸 낙상하야 가삼 쾅쾅 뚜다리며 죽고, 실없이 죽고, 어이없이 죽고, 가엾이 죽고, 허망히 죽고, 자다가 죽고, 꿈꾸다가 죽고, 한 놈은 주머니를 뿌시럭 뿌시럭 끄르더니마는, “워따, 이 제기를 칠 놈들아! 나는 이런 다급한 판에 먹고 죽을라고 비상사 넣었더니라.” 와삭와삭 깨물어 먹고 죽고, 또 한놈은 돛대 끝으로 뿍뿍뿍뿍 기어올라 가더니마는, “아이고 하나님! 나는 삼대독자 외아들이오! 제발 덕분으 살려주오!” 빌다 물에 가 풍! 또한 놈은 뱃전으로 우루루루 퉁퉁퉁 나가더니 고향을 바래보며,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나는 하릴없이 죽습니다. 언제 다시 뵈오리까?”빌다 물에 가 풍! 버큼이 부그르르르르 또 한 놈은 그 통에 한가한 치라고 시조 반 장 빼다죽고, 직사 몰사 대해수중 깊은 물에 사람을 모두 국수 풀 듯 더럭더럭 풀 제, 적극 조총 괴암통 남날개 도래송곳 독바늘 적벽풍파에 떠나갈 제 일등명장이 쓸 데가 없고, 날랜 장수도 무용이로구나. 화전 궁전 가는 소리 여기서도 피르르르르, 저기서도 피르르르르, 하저 장요 서황 등은 조조를 보위하야 천방지축 달아날 제, 황개 화전을 무릅쓰고 쫓아오며 웨는 말이, “붉은 홍포 입은 것이 조조니라! 도망말고 쉬

 

죽어라! 선봉대장 황개라!” 호통허니, 조조가 황겁하야 입은 홍포를 훨씬 벗어 군사 전립 앗아 쓰고 다른 군사를 가르키며, “참 조조 저기 간다! 날다려 조조란 놈 지가 진정 조조니라!” 황개가 꽃아오며저기 수염 진 게 조조니라!” 조조가 넋이 없어 긴 수염을 걷어 잡어 와드득 와드득 쥐어 뜯고 꾀탈장탈 도망헐 제, 장요 활을 급히 쏘니 황개 맞아 물에 가 풍! 꺼꾸러져 낙수허니공인아, 날 살려라!” 한당이 급히 건져 살을 빼어 본진으로 보내랄 적어, 좌우편 호통소리 허저, 장요 넋이 없이 오림께로 도망을 헐 제, 말을 거꾸로 잡어타고,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까딱허면은 나 죽겄다. 여봐라 정욱아! 주유 노숙이 축지법을 못하는 줄 알았떠니마는, 오날 보니 축전 축지법을 하나보다! 이 말이 왜 퇴불여전되어 앞으로는 아니 가고 적벽강으로만 그저 뿌두둥 뿌두둥 들어가니, 이것이 웬일이냐?” “어따 승상님, 말을 거꾸로 탔소!” 언제 옳게 타겄느냐? 말 머리만 쑥 빼다가 얼른 돌려라 뒤에다 붙여라! 나 죽겄다, 어서 가자, 어서 가자,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중머리>

창황분주 도망을 갈 제, 새만 푸루루루루 날아나도 복병인가 의심허고, 낙엽만 버썩 허여도 취병인가 의심헌다. 엎더지고 자빠지며 오림산 험한 곳을 반생반사 도망을 간다.

 

 

(2) 황해도민요몽금포타령, 배치기소리 / 제주도민요신아외기소리

 

민요 : 심소라 / 민요 & 피아노 : 백소망

 

<몽금포타령>

1.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보겠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님 만나보겠네

2. 바람세 좋다고 돛 달지 말고요 몽금이 앞바다 노다나 가지요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노다나 가지요

 

<배치기>

1. 어영도 칠산을 다쳐다 먹고 연평바다로 돈실러 갑시다.

후렴 : 어허어 어허어 어 어 어어어 어화요

2. 아랫웃동 다 제쳐두고 연평바다로 돈 실러간다 (후렴)

3. 돈 실러간다. 돈 실러간다. 연평바다로 돈 실러간다 (후렴)

4. 오동추야 달 밝은 밤에 새우젓 잡기가 재미가 난다 (후렴)

 

<신아외기소리>

아 아 아 야 에 에헤- 에헤요

1. 어영어영 어야디야 어영어영 어야디야 (후렴)

2. 어기여차 소리로다 밤도 넘고 들도 넘네 (후렴)

3. 진바당은 진소리로 쪼른 바당은 밭감기로 (후렴)

4. 낮도 영청에 놀당갑서 밤도 영청에 놀당갑서 (후렴)

책임과 평화의 길 Ⅰ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 문제

 

강성호(성균관대 사학과 석사)

 

 

들어가며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1953년에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비극을 설명하기에 어느 정도 충분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3년 동안 전개된 전쟁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주긴 고사하고, 오히려 분단체제를 고착화시켰다. 이에 따라 한반도 내에는 냉전 논리에 따른 체제 경쟁만이 전개되었을 뿐,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 존재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한반도에는전쟁 없는 전쟁이 지속되었을 뿐이다.

 

한국현대사에서 발생된 역사적 비극은 거의 대부분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사실상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한국현대사를 결정짓는 구조적 요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남한과 북한의 독재체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확립되었다. 남한의 이승만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으로 독부(獨夫)로의 길을 가게 되었으며, 북한의 김일성 역시 정치적 라이벌인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을 숙청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초기에 발생된 민간인 학살은 우리의 집단기억에 극우반공사상과 레드 콤플렉스를 심어주었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사례만을 거론했지만, 이처럼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남겨준 역사적 유산은 어마어마하다. 따라서 한국현대사를 알기 위해서 한국전쟁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사를 알기 위해서도 한국전쟁은 꼭 거쳐 가야 하는 관문이다. 한국개신교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잃고, 또 무언가를 얻거나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과 결과는 전쟁이 끝난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글은 한국전쟁 시기에 한국개신교가 어떠한 역사적 경험을 겪었는지를 고찰한 다음, 여기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자 한다.

 

우익의 종교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에 비해 우편향적인 모습을 강하게 보였다. , 반탁-단정 노선을 충실히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장악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당시 불교와 천도교는 좌파나 중도파의 영향력이 강했고, 천주교의 경우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다가

단정 노선으로 선회했다.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볼 때, 해방정국에서 한국교회의 우편향성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1공화국(1948-60) 시기 동안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은 해방정국 시기에서부터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극우반공체제의 성립에 크게 관여하였다. 대표적으로,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에 큰 도전이었던 제주도와 여수·순천 및 지리산 일대의 무력 충돌 사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했었다. 제주4·3사건이 발생했을 때, 영락교회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경찰과 협력하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다음은 한경직 목사의 발언이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3]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는 이북에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모여 만든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주의적 성형이 무척 강했다. 문제는 영락교회의 청년회가 군경과 함께 제주4·3사건 때 제주도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립 당시 회원수가 229명에 달했던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주도하고 반탁운동, 기독교민주동맹의 창립대회장 습격, 제주4·3의 진압 등반공건국, 멸공건국, 승공건국을 위한 활동에 헌신했던 것이다. 영락교회 청년회의 핵심회원 중 한명은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린 오제도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에 나왔던 이 발언은 제주4·3사건을공산폭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당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 규명된 현재의 경우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책임지고 반성해야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4]

 

또한, 교회 지도자들은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교육에도 참여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켜 사상 교화의 역할을 했던 사상통제기구였지만, 가입자 수가 위로부터 할당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좌익사상과 무관한 민간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문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던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약 3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조직에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했던 것이다.

, 1950 3월 경남 밀양지역의 경찰서가 실시한 합숙훈련에서지방 특지(特志)교회책임자가 정신 방면의 강사로 활동했던 것을 볼 수 있다.[5] 성결교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윤파석은 마포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이었으며, 국민보도연맹 마포지구의 지도 위원이기도 했다.[6]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극우체제의 성립과 밀접한 보도연맹에 교회 지도자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한국교회는 반공적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폭력의 신학을 외치게 되었다.

 

전쟁 지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교회는 대한기독교구국회, 기독교의용대, 선무공작대 등을 조직하여 다양하고도 적극적인 전쟁 지원 활동을 벌였다. 대한기독교구국회는 1950 7 3일 피난차 대전에 온 교회 지도자들이 결성한 것이었다. 이 단체는 선무, 구호, 방송 같은 일을 과제로 삼고 있었지만, 연대 규모의 기독교의용대를 조직해 전선 배치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된 이후 대한기독교구국회는 선무공작대원을 국군의 점령지역에 파견하여 선전활동(Propaganda)을 벌이게 했다. 전쟁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함석헌 은기독교의용대나 조직해 불신자로부터는 병역기피라는 비방이나 듣고, 수많은 청년을 양심의 평안도 못 얻고 육신의 생명도 못 누리고 죽게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7]

 

한국전쟁에 대하여 한국교회는반공성전의 논리로 지지하였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식민지 시기부터 형성되어 왔었다. 1932년 장로교와 감리교로 구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채택한 <사회신조>일체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 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한다고 명시한 일이 있었다. 이미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반공주의를 교리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 교회지도자 중 하나였던 한경직 목사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공산당들에 의해 촉발된가인과 아벨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 “형체를 알지 못하는, 동포도 모르는, 민족도 무시하는 공산당들의 침략으로한국전쟁이 발생했으며, 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당한순국 영령들이야말로 모두 아벨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8] 더 나아가 한경직 목사는자유민주국가의 첫째 되는 원수는 공산당이며, “우리는 이 자유를 확보하려면 이 자유의 첫째 되는 원수를 격멸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9] 전쟁 자체에 대해 비판하거나 거부의 태도를 보이기보다 어느 한쪽 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상적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킨 것이다.   

성전(聖戰) 담론은 한국교회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통시키는 주요 창구이다. 1985년 육군 군종감실에서 출간한 『군진신학』이라는 책에서 서철원은전쟁 수행 중 이루어진 살생은 국가의 존속을 위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정당방위로 용납되고, “침략 전쟁에 동원되어 참가했을 때도 정방방위 전쟁과 동일하게 해결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국가에 의해 수행되는 모든 전쟁 행위에 면죄부를 주었다.[10] 김갑동은 전쟁을인간의 모든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파악하고, 전쟁의 궁극 목적은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와 건설에 있으며, “어떤 국가이든 그 형성과 유지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신비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전쟁의 필연성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聖戰의 논리를 설파하였다.[11] 이처럼 한국교회의 전쟁 담론은 현존 국가 체제에 봉사하는 정치 신학으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포로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요더가 말한 것처럼, 성전론(聖戰論)과 같은정당한 전쟁론은 특정 유형의 폭력을 합법화 할 수 있는 특별한 경우를 설정함으로써 폭력의 정당성을 확보할 뿐이다.[12]

 

 

휴전 반대운동

 

두 번째 전쟁 지원 활동은 대중 집회를 통한기도회의 정치였다. 이것은 휴전이 임박한 1953년도까지 지속되었다. 195012 27일에 개최된 연합신도대회는 UN과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한국전쟁을세계 민주주의 자유국가들과 공산독재 국가들과의 양진영 사이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최후결전의 전초전으로 평가하고, “한국땅 위에서 일으킨 양 진영의 최후결전을 UN군의 승리로 마칠 때까지 전진무퇴할 것을 정부와 UN군에게 요청하였다.[13] 이러한 집회는 휴전이 논의되고 있던 1953년도에도 열렸다. 6 14일 서울에서는 북진통일 기원대회가 개최되었고, 6 15일 부산에서는 구국신도대회가 열렸다. 구국신도대회는 세계교회에 보내는 성명서에서우리는 공산주의와 유화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공산주의와의 타협을 권고하는 것은광야 40일 간의 시련에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마귀와의 타협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미국 대통령(당시 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성명서에서도 구국신도대회는 미국이 북한을설복될 수 없는 마귀가 아니라회개할 줄 아는 선의의 죄인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논의되고 있던 휴전회담을 전면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이승만 정권의 체제 강화와 밀접한 북진통일 및 휴전반대운동을 지원한 것이다. 사실 구국신도대회는 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NCC)총무였던 유호준 목사가 밝혔듯이, 교회에 출석하는 국회의원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개최될 수 있었다.[14] 이것은 정부 개입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추정하게 만든다. 더구나 6 13일에서 15일까지 전국 대도시에서 조직적으로 열렸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이 있지 않았을까. 여하튼 한국교회가 휴전회담 반대운동 등을 통해 전쟁을 지원하면서 이승만 정권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밀착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휴전반대운동은 세계교회들의 입장과 달랐다. 가장 먼저, 평화주의의 전통에 있는 퀘이커는 1952 8월 인도의 중재를 통하여 한국의 평화를 실현하라는 탄원문을 발표하였다.[15]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하 CCIA의 총무 놀디(Otto Frederick Nolde)는 휴전이 통일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외국교회들의 보편적 입장을 한국교회에 알리고 이것을 설득하기 위해 1953 6월 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약 3년 동안 지속된 전쟁을 일시적이나마 중단하기보다 무력으로 북진(北進)하여 상대방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원하는 한국교회의폭력의 신학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구국신도대회의 성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교회는 대화와 협력보다 적대적 타자를 향해 폭력적 진압을 가할 것을 촉구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국민으로서의 나가 예수의 말씀대로 칼을 칼집에 도로 꽂고, 왼쪽 뺨을 돌려야 하는제자로서의 나보다 더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과의 유착(christendom)[16]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어난 사건 중 중요한 것은 이승만 정권과 한국교회의 본격적인야합이다. 이승만 정권 시기의 한국교회는 정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펼쳤다.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의어용종교로서 이승만 및 그가 지목한 부통령 후보(함태영 목사와 이기붕 권사)의 당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한국교회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은 제2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1952 85정부통령 선거에서부터였다. 1952 7 24일 교회연합기구였던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한국기독교정부통령 선거대책위원회>(이하 기독교선거대책위)를 조직하고,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기독교선거대책위는 7 29-30일에 각 도 소재지에 중앙위원 2명씩을 파견하여 도위원회와 군위원회를 31일까지 조직하고, 이승만 지지의 내용이 담긴 격문을 전국교회에 발송하였다.[17] 2-3일이라는 짧은 시기 동안 전국의 도, 군에 하부조직을 결성하려고 했던 배경에는노회라고 하는 개신교의 지역 조직을 활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독교선거대책위는 정부통령 선거를 불과 이틀을 앞둔 8 3일이 일요일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전국 교회가 국가와 선거를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추진하면서 기권 방지를 위한 선전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52 85정부통령 선거를 통해 이승만 정권과 개신교의 유착관계는 공식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장로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승만은 개신교에 특혜를 집중시키고 다른 종교들을 직간접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개신교를공인종교로 만들었다.[18] 따라서 개신교는 체제의 종교이자 자유당의 유사 기간단체로 전락하여 이승만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개신교는 반공집회 등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반공정책을 뒷받침하거나 선거 시기에 자유당의 입후보자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후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때 개신교는 이승만의 당선 축하 예배를 거행해 당선에 대한 정당성을 선전하기도 하였다.[19]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은기독교 정권(Christendom)’으로 인식되었다.

 

비극은 1952정부통령 선거 시기 부통령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크게 3파로 나누어 대립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감리교 목사이자 조선민주당의 당수인 이윤영 목사를 지지하는 감리교와 월남인세력, 이갑성을 지지하는 정통보수신학파, 장로교 목사이자 심계원장이었던 함태영 목사를 지지하는 한국신학계통의 신학파 사이의 대립이다.[20] 이러한 상황에 따라 장로교와 감리교는 자신이 지지하는 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 각각 선거운동조직을 임시로 결성하게 된다. 크게 이윤영과 함태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감리교-서북파-월남인-『기독공보』로 이어지는 세력은 이윤영 목사를 지지하였고, 장로교-기호파-『한국기독신문』으로 연결되는 세력은 함태영 목사를 지지하였다

 

먼저, 이윤영 목사는 조선민주당의 공천을 받았다. 이윤영은 서북파 기독교세력을 대표하여 부통령에 입후보하였기 때문에 이윤영을 지지하는 세력에 서북파의 참여는 월등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21] 이윤영을 지지하는 서북파 기독교세력은 1952 7 27일 해군사병구락부에 모여 <이윤영선거후원회>를 결성하였다.[22] 이윤영선거후원회에 참여한 단체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4개 주요교파와 기독공보사, 한국기독교교육협회, 한국교회음악협회, 한국시청각전도회, 기독학생회, 절제회, 평양 YMCA 8개 기독교단체였다.

 

서북파 기독교세력이 이윤영의 당선을 위해 이윤영선거후원회를 조직한 것처럼 기호파 기독교세력은 함태영 목사의 당선을 위한 조직을 결성한다. 그것이 바로 <함태영부통령선거추진 기독교동지회 중앙본부>(이하 함태영기독교동지회)이다. 함태영기독교동지회의 회장은 전필순 목사였다. 함태영기독교동지회의 결성은 1950년대 정교유착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3대 부통령에 함태영이 당선된 이후 함태영기독교동지회는 1952 9월 정식으로 <기독교동지회>를 발족하여 임시적 성격을 탈각하고 1960 4·19혁명때 까지 이승만 정권과 유착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함태영기독교동지회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기독교 외곽단체이자 한국기독교의 선거운동을 주도한 기독교동지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의 평화주의 전통

 

이와 같이 주류 교단들은 한국전쟁 시기에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그것을 복음과 동일시하면서 전쟁을 정당화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는 반전평화운동의 사례도 발견할 수 있다. , 1938년 황해도 해주의 감리교 전도사인 김만식과 전남 나주의 김영환이전쟁은 죄악이라고 비판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총독부가 황해도 지역에서 기도문, 설교집 등을 분석한 결과 수집된 76점의 자료 가운데 적극적으로 일본의 전승을 기원한 것은 한 점도 없고, 평화주의 내지 박애주의에 기초하여 빠른 전쟁 종결을 기원한 것이 20점에 달했다고 한다.[23] 

 

이와 함께 1941년에 발생한만국부인기도회 사건은 일제 시기의 한국교회가 평화를 고백했음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사례이다. 만국부인기도회는 1925년경부터 실시되어 왔던 것으로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성격이 강했다. 문제는 총독부가 기도회의 내용을 근거로 만국부인기도회가 일제의 정책을 비판하고 반전적 분위기를 야기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려 획책한 반전모략사건으로 규정한 일이다. 총독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을 결정적으로 마련하려고 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기도회의 내용은 총독부가 반국가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혐의를 두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전시체제 하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국부인기도회는하나님은 화평한 세상을 원하시나 개인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저버림으로써 개인의 생활로부터 온 세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쟁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니만큼 현실세계를 돌아보며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총독부의 수사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례1- 金能善 심문조서.

: 기도회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 만국부인들이 한 가지 문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 문제는 무엇인가?

: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같이 인간도 사랑으로 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국(我國)은 목하 지나사변을 일으켜 지나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평화가 이루어지길 위하여 기도회를 하였는가?

: 그렇습니다. 아국이나 지나가 예수교를 믿게 되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사례2- 金亨信 심문조서.

: 자국의 이익을 도모, 타국을 괴롭히고 더욱 이를 도와주지 않는 것을 고백한다고 했는데?

:  일본국 이익만 생각하고 중국의 이익이 되지 않음은 생각하지 않았음을 나빴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지나사변은 여하한 전쟁인가?

: 아국은 면적이 적어서 이를 넓히기 위하여 하는 전쟁으로 생각합니다.

: 이 전쟁은 기독 마음에 적당한가, 부적당한가?

: 기독의 마음에 반하고 있습니다.

: 여하한 곳이 상반되는가?

:  신은 모두의 평화를 좋아하나 아국은 면적이 협소하므로 전쟁을 하는 것이니 그 점이 상반되어 있습니다.

 

심문조서의 내용을 보면, 중일전쟁을 성전이라 선전하는 총독부의 군국주의에 반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중일전쟁의 침략성을 비판하며 평화주의, 박애주의를 견지하여 기도회를 실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에 대한 반대는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와 같은 소종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39년 여호와의 증인 대부분으로 추정되는 38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신사참배 거부 등의 이유로 구속된등대사 사건이 발생했으며,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집총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1950년대 후반기 감리교신학대학의 학장이었던 홍현설 목사는집총을 거부한 안식교 청년이나 여호와의 증인 청년이 양심적인 반전론자였다면 자기들의 종교적 양심 때문에 이런 길을 취한 데 대하여 이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종파 신자들의 집총거부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24]

 

1991년 초에 일어난 걸프전은 전쟁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중동전쟁과 종교라는 특집을 낸 1991 4월호 <기독교사상>을 보면, 필자들은 대체로 전쟁을 통한 분쟁 해결 방식을 반대하고, ‘정전론(正戰論)’을 편의에 따라 자의로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기존의 주류 전쟁 담론에 맞서는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성전론이 일방적으로 횡행하던 한국교회의 전쟁 담론에 균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균열은 2003년과 2004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 파병 논의 과정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이라크 전쟁을정당하지 않은 전쟁으로 규정하고 파병에 반대했던 것이다.

 

 

 

 

 

 

 

 

 

 

 

 

 

 

 

 

 

 

 

 

 

 

 

 

 


책임과 평화의 길 Ⅱ

 

은폐된 화해의 역량

Concealed capacity and energy of Reconciliation

윤환철(facebook.com/goodngo)

 


o 적군을 만나다[25]

1992년 남한으로 건너온 김현식 전 김형직사범대학 교수는 인민군으로 6.25 당시 자신의 머리에 박격포탄 파편을 박아넣어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했던 국방군 포 소대장을 서울에서 해후했다. 일생 머릿속 파편으로 고생해 온 그는 분노와 설움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내 중장으로 예편한 국방군은 그에게 사과하고 서로 혁대를 바꾸어 찬다. 김 교수는 그 혁대를 찰 때마다 “그 사람이 보여 준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을 온 몸으로 느낀다”고 썼다.

2001, 김 교수는 미국에서 6.25에 참전했던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한 부인을 만난다. 그는 자기 눈 앞에서 몸이 두동강 나 뒹굴던 미군의 사체를 떠올리고 그 부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 “제가 바로 … 수 많은 수류탄을 던진 북조선 병사입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 부인도 그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o 전면전을 치른 교전 상대국과 수교하다

6.25 전쟁은 남한 vs. 북한, 미국 vs. 중국의 직접적 교전을 포함한다. 중국의 ‘항미원조전쟁(抗美援助戰爭)’ 규정은 당시 중국이 누구와 싸웠는지를 명확히 표현한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과 “정치, 군사, 경제, 그리고 문화 협력에 걸쳐 광범위한 협력관계를 수립”하였다. 1978 5월부터는 중국과 본격적인 수교협상을 개시하여 동년 12월에 수교를 완성하였고, 1979년에는 미국 수출입은행(EXIM)의 차관제공, 미국 내 중국 동결자산 해제 등 재산권 문제도 해결하였다.[26]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는 소련이 공동의 견제대상이라는 점이었다.[27]

당시 중국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① 공산주의 국가

② 비시장경제(non-market economy)

③ 핵 개발 성공(이후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국가 핵개발)

오늘날 미국이 북한에 대해 경제제재를 가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⑴자국의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 ⑵국제 테러리즘을 지원 혹은 지지하는 국가, ⑶공산주의 정부 및 맑스-레닌주의 국가, ⑷대량파괴무기 확산 등이다.[28] 미국이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정성을 쏟을 당시 중국은 ‘테러리즘’을 제외한 모든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75년에 미국은 뼈아픈 패전(1964~1975)을 안긴 베트남과 국교를 단절하였으나 불과 종전 2년 후인 1977년에 무조건적 수교를 제의했다가 베트남 정부로부터 거부당했다. 베트남 정부가 배상금 우선 지불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과 서방의 베트남 경제 제재가 있었고, 1992년부터 제재를 완화하기 시작하자 미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하였고 1994년에는 제재가 전면 해제되었다. 수교는 그 이듬해인 1995년에 이뤄졌다.[29] 미국이 경제제재조치를 해제함으로써 베트남의 외자(민간 자금) 도입을 가능하게 되었으며 국제금융기구의 공적자금도 유입되었다.

 

o 유전자 간의 전쟁

‘로미오와 줄리엣’, 두 연인은 몬터규 집안과 캐퓰럿 집안의 싸움이 왜 시작되었는지 몰랐지만 희생은 치르고 만다. 원한이 오래간다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모르는 전쟁’에 휘말린다는 것을 뜻한다. 나중에는 “싸웠으니까 싸운다”는 맹목이 등장한다.

남북한은 이미 맹목적 싸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1994년생(92년 주장) 김정은을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그의 기대수명이 앞으로 40년쯤 된다면 남한을 포함한 외부 세계의 파트너는 완전히 전후 세대로 구성된다.

이들은 전쟁과 그 이후의 갈등시기에 없던 인류들이다. 굳이 그 존재를 찾는다면 ‘유전자’ 상태로 존재했었다. 우리는 ‘유전자 간의 전쟁’을 향해 가고 있다.

 

o 치유된 사실, 치유의 가능성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13:15)

인간이 심히 죄된 것도 현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수 있는 것 역시 현실이다. 교회는 기독교적 관점의 온전한 회복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의 대 사회적 확산으로써 전쟁 이후의 집단적 회복과 치유를 추구할 수 있다.

남북한은 분단 직후부터 줄기찬 통일 노력을 기울여 왔고, 두 차례 정상회담까지 가진 바 있다. 정상회담의 지지 여론은 높았다. 시간으로 보나 절차로 보나, 화해의 프로세스를 진행하기에 부족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회복’ 방향의 가능성과 현실을 도외시하고 ‘상처의 기억’을 더 들춰내고 “우리는 회복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적개심에 불타고 있다.”며 후세대에게도 이를 물려주고자 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이는 치유의 사실을 부정하거나 치유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죄된 세상과 그 세상에서 이뤄지는 섭리에 대한 거부이며, 자해적 태도일 가능성이 높다.

 

o 화해의 역량을 드러내야

전쟁을 겪은 쌍방의 개인도, 국가()도 어느 정도의 시간과 계기가 있다면 화해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남북한 역시 그러한 시기와 계기가 충분히 있었다.

복음을 따르는 교회의 회중들은 갈등을 겪는 집단들 사이에서 이러한 화해의 필요성과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한국의 대중들이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북한이 어째서 ~”라고 말할 때 자신의 책임이 회피되고 화해의 능력이 부정된다.

동아시아의 과거 갈등에 더 많은 책임을 갖고 있는 미국은 전략적 필요에 따라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북한에 대해서도 그러한 프로세스를 시작하여야 한다. 미국 정부가 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시민들, 미국 교회의 회중들이 나서야 한다.

 

 

 

 

 

 

 

 

 

 

 

 

 

평화의 기도

장원세 (복연세미나팀)

 

 

1. 기도의 배경 -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양쪽 모두에게 지우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는 아물지 못한 채 오늘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구축된 국가의 정치사회 질서는 휴전 이후에 양 국가의 정치사회 체제로 고스란히 스며들어 오늘날의 남한과 북한 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남한 사회를 중심으로 그 영향들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표현의 자유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반쪽 국가를 탄생시켰다.

 

  전쟁의 결과로 북한에는 공산주의가, 남한에는 극우 반공주의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전쟁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며, 특히 남한에서는 기독교의 부흥과 함께 반공사상이 거의 종교화되다시피 하였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근간이 되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사상의 자기검열을 강화시켜 대중이 국가와 언론의 눈치를 살피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기회주의자들은 득세한 반면, 진실과 정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해야 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회적 결과를 초래 하였다.

 

둘째, 안보를 핑계삼아 초법적인 국가주의가 정당화 되었다.

 

  한국전쟁의 수혜자는 김일성과 이승만을 비롯한 소수의 국가 관료들일 뿐, 대다수 국민들은 전쟁과정에서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국가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명분삼아 한국전쟁 기간 중에 수많은 민간인들의 인권이 유린되었다. 학살은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도 여전히 국가안보는 한 개인의 인권에 우선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안보의 위협이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정치사회적 입지를 위해 십분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반공을 앞세워 민주주의(국민이 국가의 주인됨)를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초법적 국가주의를 형성시켰다.

 

셋째, 개인의 안위만이 최우선의 목표가 되는 이기적·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고착화시켰다.

 

  한국전쟁 과정 속에서 국민들은 국가로부터 여러번 배신을 경험했다. 전쟁 발발 당시 국가를 신뢰하여 적극적이고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던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선의 잦은 이동 속에서 생존을 위해 부역해야 했던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처벌당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의 축적은, 국민들이 국가를 신뢰하지 않고 각자가 오직 생존만을 최우선적으로 도모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에는, 국가나 사회의 현실에는 무심하고 개인과 가족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소시민적 삶의 태도가 정당화되고 보편화되었다.

 

이상을 통하여 살펴본 것처럼, 한국전쟁(이에 대한 국가주의적 해석)은 국가질서 유지의 핵심적 수단으로 작동해왔으며 한국시민사회 분위기의 짙은 배경을 형성하였다. 휴전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정치사회학은 언제든지 다시 부활될 수 있을만큼 여전히 그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 땅에는 아직도 서로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충만하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의 연장 속에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3. 평화를 위한 개인 기도문 작성

 

※ 세미나를 통해서 느끼고 깨달은 바들을 기도문으로 작성하며 함께 고백해 봅시다.

 

3. 평화 기도문

 

주님,

 

먼저, 전쟁이라는 극악한 폭력의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한국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너무나 안타깝게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무고한 희생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여전히 그 그늘아래 살아가는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전쟁과 분단 이후 한국교회의 과오들을 회개합니다.

반공과 안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지지하고, 증오를 조장하며, 정권과 유착해왔던 한국교회의 지나온 역사들을 회개합니다. 한국교회가 반공을 앞세운 증오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앞세운 평화로 거듭나게 하소서. (아멘)

 

전쟁으로 인하여 비틀어져있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한국사회는 아직까지도 안보라는 국가적 명분 속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뒤틀린 민주주의를 다시 바로잡아주시고 국가를 위한 국민이 아닌, 진정 국민을 위하고 국민을 섬기는 이 나라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땅에 증오가 가득합니다. 한반도에 드리워진 증오와 어둠의 그림자들을 거둬가 주십시오. 지금도 꺼지지 않는 전쟁의 불씨들을 잠재워 주십시오. 이 민족이 함께 회개함으로 서로를 용서하게 하시고 하나되는 날이 오게 하소서. (아멘)

 

(다함께)

주님, 이 모든 기도 가운데 저와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의 도구로 기꺼이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부디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퀴즈로 푸는 한국전쟁

                                                                                            

유태완 (복연세미나팀)

 

1. 1951년 육군 제11사단 9연대가 '견벽청야(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은 초토화시킨다) 작전'에 의해서 실행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에서 전체 피 학살자 중 14세 이하 어린이 사망자의 비율은 얼마인가?

 

① 30%

② 35%

③ 45%

④ 49%

 

정답 : ④

해설 : 거창 양민학살사건으로 알려진 지리산 동편 일대의 학살 사건은 실제로는 거창·산청·함양 등지에서 발생했으며 주민 1,500여명이 피해자가 되었으며 피학살자가 총 719명에 이른다. 그 중 14세 이하 어린이가 359명이었다.

전쟁 전후의 모든 학살, 특히 국군 측이 자행한 학살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린아이와 여성 등 저항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도 학살을 가행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잔인한 학살은 한국전쟁 이후 베트남전쟁에서 또 반복되어진다.

 

 

2. 1949년 좌익전향자를 중심으로 한 준()국가단체였던 국민보도연맹이 있었다. 전쟁 직후 일어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해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수는 총 몇 명으로 추정되는가?

 

① 30만명

② 20만명

③ 10만명

④ 5만명

 

정답 : ②

해설 : 한국전쟁 발발 전, 좌익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사람들이 가입해 있던 준()국가단체. 전쟁 직후 평택 이남부터 일어난처리를 통해 2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당한다. 그런데 이 단체에는 좌익전향자 뿐 아니라 식량이나 비료를 받기 위해 가입한 농민들도 많았기 때문에 무고한 국민들이 많이 죽었다.

 

3. [주관식] 다음의 날짜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8 04 03 :                

1948 10 19 :                

1946 1001:                

 

정답 : 제주 4.3사건, 10,19 여수·순천사건, 대구 10.1사건

해설 : 한국전쟁 이전에 발생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과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 4.3사건은 1948 4 3일부터 1954 9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한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 ·순사건은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이다, 14연대가 봉기를 일으켜 내분을 일으키자 계엄군이 군인들을 진압하면서 여수·순천의 무고한 국민들까지 학살한 사건이기도 하다. 제주4·3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 대구 10,1사건은 해방 이후에도 친일경찰들이 물러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한 군중들이 시위를 하다 황말용, 김종태라는 노동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무력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치갈등이 경찰과 민중 간의, 그리고 좌익과우익간의 갈등이 처음으로 큰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이후의 집단학살과 갈등을 예고하는 부표가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 이전에도 민간인 학살을 이루어졌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사회적 갈등이 극심했다.

 

 

4.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 비율은 얼마인가?

 

① 41.2%

② 65%

③ 73%

④ 85%

 

정답 :  ④

해설 : 1차 세계대전 때 민간인 사망자 비율은 41.2%, 2차 세계대전 때 민간인 사망자 비율은 65%였다. 이에 비해 한국전쟁 민간인 사망자 비율은 85%,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다른 전쟁에 비해 극심하게 높은,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5. [주관식] 한국전쟁 총 기간은 37개월, 3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기간 가운데에서 휴전 협상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정답 : 2.

해설 : 1951 7 10일에 시작해서 1953 7 27일까지 본회의 159회를 비롯한 총 765회에 이르는 회의를 열었다. 거의 매일매일 회의를 한 셈이다. 그러나 휴전협상은 양국의 이해관계, 열강의 이해관계로 인해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 기간 동안 전선에 있는 젊은 군인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고지전이 이 때 많이 이루어졌고, 백마고지같은 경우에는 하루에 5번씩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했다.

 

 

6. [O/X]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이 평온하게 지내던 중 북한이 적화통일의 야심을 품고 남침한 전쟁이다.

 

정답 : X

해설 : 북한이 적화통일,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남침한 것은 맞지만 한국전쟁 이전 남과 북의 상황은 평온하지 않았다. 북한의 경우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정화 되어 갔지만 남한은 민간인 학살과 계속되는 정치갈등 들이 있었다. 그리고 남과 북은 한국 전쟁 이전에도 소규모 국지전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국지전으로 인해서 전선에서만 인명피해가 9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서명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저자

박태균

출판사

책과함께

쪽수

407 페이지

출간일

2055 6 25

 

도서명

전쟁과 사회

저자

김동춘

출판사

돌베게

쪽수

488 페이지

출간일

2006 11 30

 

도서명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저자

김태우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사)

쪽수

487 페이지

출간일

2013 7 27

 

도서명

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저자

박찬승

출판사

돌베개

쪽수

320 페이지

출간일

2010 6 24

도서명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

저자

한국구술사학회

출판사

휴머니스트

쪽수

288 페이지

출간일

201189

추천도서



[1] 군사문제연구소, [한국전쟁일지], 1991

[2] 사상자 수는 정확하게 집계하기가 어렵다. 본 글에서는 정부와 연계가 많은 학자들이 집필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상자 수를 기입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1; 유완식, 김태서, [북한 30년사], 현대경제일보사, 1985

[3]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

[4] 이와 관련하여 1998년은 제주4·3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주목할 것은 6 22일 민족선교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한 사실이다. 세미나의 참석자들은제주4.3을 외면해온 한국교회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다짐했다. 9 22일 민족선교연구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주지방회와 함께 ‘4.3해결의 과제를 주제로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도교회가 그 동안 4.3의 아픔을 외면해온 데 대한 회개를 다짐했다.

[5] 『연합신문』1950.3.16.

[6] 윤판석, 『간증백세』, 신망애출판사, 1970, 63.

[7] 함석헌, 「한국기독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상계』1956 1월호.

[8] 이승준, 「한경직 목사의 목회사상」, 『목회와 신학』141, 2001.2, 172.

[9]『한경직 목사 설교전집』12, 1971, 347. (진상범, 「한국개신교의 전쟁 이해와 전쟁 거부」, 『종교문화연구 제13, 2009.12, 225쪽 재인용)

[10] 서철원, 「조직신학적 견지에서 군진신학의 고찰」, 軍陣神學, 군복음화후원회, 1985, 45-84.

[11] 김갑동, 「구약에서 본 전쟁과 신앙인」軍陣神學, 군복음화후원회, 1985, 237-280.

[12] H. 요더, 『근원적 혁명』, 대장간, 2011, 157.

[13]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1956, 89.

[14] 『기독공보』1953.6.22.

[15] , 옥스퍼드에서 열린 퀘이커 교우회 세계대회는 미국, 영국, 소련, 중공의 4대국 외상 및 판문점휴전회담 대표들에게한국전으로 야기된 비극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지대하다. 우리들은 모든 관계 정치지도자들이 평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건설적인 노력을 할 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며, 특히 평화알선을 위한 인도의 활발한 노력이 있기를 원한다. 전 세계의 친구들은 모름지기 관계당국자들이 평화의 길을 지향하도록 기도함을 우리들은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보낸 것이다. (「퀘이커교파 세계대회서 중재로 휴전성취」, 『경향신문』1952.8.9) 이어서 9월에는 영국 퀘이커가 처칠 수상에게 서한을 보내고 한국에서의 평화를 위한 4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이 안은 정전회담에서 합의에 도달한 협정에 기초를 두고, 즉시 정전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포로교환문제는 쌍방 측에서 임명한 국가들의 대표로서 구성되는 합동위원회에 일임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9 17일 영국 정부는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서한이 아직도 수상에게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국휴전 4개조안 퀘이커교도제의」, 『동아일보』1952.9.20)

[16]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필자는 「1950년대 중후반 이승만 정권·개신교와 천주교의 갈등」(성균관대 사학과 석사논문, 2014)이라는 논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17] 「기독선대위활발본격적」, 『한국기독신문』1952.8.3.

[18] 한국교회가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받았던 특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국기에 대한 경례방식을 배례에서 주목례의 방식으로 바꾼 것, 타종교의 참여가 봉쇄된 군종제도와 형목제도의 도입, 국가의례를 기독교식으로 제정한 것, 정치권력의 핵심부에 개신교 인사들을 포진시킨 것,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제정한 것, 국영방송을 통한 선교활동, 주일선거 반대운동의 관철 등이다.

[19]「교회혁신의 과제」, 『기독교사상』제34, 1960.7, 45.

[20] 엄요섭, 『교회와 사회』19539월호, 15-17. (김용복, 「해방후 교회와 국가」, 『국가권력과 기독교』, 202쪽 재인용) 그런데, 이갑성을 지지하는 전통보수신학파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다.

[21] 「선거전선을 가다(), 『민주신보』1952.8.3.

[22] 「이윤영선거후원회결성」, 『기독공보』1952.8.4.

[23]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思想彙報16, 1938.9, 10-13.

[24] 홍현설, 「안식교도의 집총거부사건에 대하여」, 『기독교사상』19, 1959.3, 35

[25] 김현식,80 7만 리 - 통일 한반도를 향한 생명의 전주곡』, (서울: 홍성사, 2013), p. 353.

[26] 양문수,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해제가 북한경제에 미치는 영향’, 통일부 용역보고서, 2007. p. 21~23.

[27] Robert S. Ross, Negotiating cooperation : the United States and China, 1969-1989,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p. 246.

[28] 박인휘, 우승지, 서보혁, ‘북한체제 변화에 대비한 국회의 역할 연구: 미 국회의 체제전환 국가 지원법 사례를 중심으로’, 2011년도 국회연구용역과제 보고서, (한국의회발전연구회, 2012)

[29] 양문수,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해제가 북한경제에 미치는 영향’, 통일부 용역보고서, 2007. p. 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