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순종과 반항
지난 1월 선교한국 ‘기도합주회’에는 “북한 정권이 남북 관계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기도하자는 제안이 실렸다. 2017년 12월 중순에 작성된 것이었는데, 그 때는 북-미 갈등이 파국을 우려할 정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보였다. 정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이 기도제목이 발행되고 며칠 후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 축하와 참가 발언이 나왔고, 이후 패럴림픽을 지나 북-미 회담 소식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동아시아 문제의 ‘운전자’가 되었다.
2월 10일에는 김여정이 청와대에서 김정은의 친서를, 3월 6일에는 정의용 실장이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각각 전달했고, 3일 후 트럼프 대통령은 정의용 실장의 보고가 마치기도 전에 북-미 회담을 수용하는 급반전 상황을 보았다.
반면, 분명히 옳게 기도하는데 이뤄지지 않고 상황이 악화하는 나날들이 있다. 기도의 방향이 틀렸거나, 저항하는 세력이 있는 경우다. 언젠가는 “하나님, 심판을 당대에 행하셔서 인간들이 방자하게 행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곧바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의 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치길, “주님, 작은 죄인들은 돌이키도록 기다려 주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큰 죄인들은 곧바로 심판해 주세요” 했다.
촛불 혁명과 권력자들에 대한 심판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애끓는 심정을 주님이 불쌍히 여기신 결과인지도 모른다. 확연한 것은 우리는 기도할 때 땅에서 선이 행해지지 않는 걸 알아차릴 뿐 아니라 타들어가는 주님의 심정을 일부나마 넘겨받게 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타인의 고통이 만연한 때에 스스로 평온한 신자가 있다면 기도 생활을 점검해봐야 한다.
새벽기도 개근보다 중한 것
한국 교회에 “기도가 부족하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열심히 ‘새벽기도’다. 다만 우리는 그 기도의 내용과 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새벽기도 개근상 받는 명성교회 교인들은 ‘세습’ 앞에서 분별력을 잃었고, 안산의 교회들은 자기 주일학교 학생의 희생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가슴앓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교회가 불의한 정파와 권력을 옹호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고 성도들을 여론조작의 먹잇감으로 내주기까지 했다.
현재 진행형
지난 3월에는 같은 매체에 “① 남-북-미 정상 수준의 접촉과 대화가 이뤄지도록, ② 한국 교회가 반평화 세력을 구별할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제안했다. ①에 해당하는 남북 정상회담은 4월 27일로 정해진 후 남북 간 실무접촉이 진행중이고, 북-미 정상회담도 물 밑에서 진행된다는 뉴스가 들린다. 기윤실은 4월 6일 ‘한국교회 가짜뉴스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하에 세미나를 열었다. ②에 해당하는 변화인데, 이제 시작이다. 여론을 조작하고 반평화 선동을 일삼는 조직과 거기 연료를 공급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기도해야 한다. 믿음에 상응하는 징조를 만나면 경외하는 중 기뻐할 수 있고, 누군가의 불의와 불순종에 선한 뜻이 막히면 주님과 함께 가슴앓이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도는 무조건 통한다. 기도자의 소망에 앞서 하나님의 심정과 먼저 통하는 것이 기도다.
윤환철 /복연 자문위원, 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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