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잡지 [월드뷰] 2017년 1월호 <세계관동역회 통합 이후 7년, 길을 묻다>에 기고한 발제요약문을 부분 수정한 글입니다.
기독교세계관 논쟁으로 본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운동의 전개와 추이
이강일(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젊은 다음 세대의 문제 인식을 말하기 이전에, 편의상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1,2,3세대로 나누어 세계관운동을 시작한 지금의 세계관동역회 세대를 1세대로, 그리고 그 1세대의 저서를 읽으며 적극적으로 수용한 저의 세대를 2세대, 지금의 젊은 세대를 3세대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왜 세계관동역회의 세계관운동이 3세대에게 비판을 받는가?’라 생각합니다. 제 경우, 약 25년을 이십대 젊은 세대 대상으로 사역을 하며 1세대 선배들을 변호하는 입장에 있다가 지금은 오히려 3세대와 함께 비판하는 입장에 있어 이 자리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복음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쓴 제 논문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저는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 기독지성운동의 일환으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 전개 과정에서 기독지성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한국에서는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어 왔는지 역사적 배경을 이야기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개념이 워낙 큽니다. 그 기원을 정리하면,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의 경건주의에서부터 시작했다 볼 수 있습니다. 비주류에 속한 초교파적 성격을 띠며 자발적인 성향을 띱니다. 돈은 없고 신앙은 뜨거운 자체적으로 모인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이런 분파 운동을 ‘소사이어티(society)’라 하더군요. 이 흐름이 영미권에서 대중화 된 시점이 19세기 대각성운동이라 볼 수 있죠. 웨슬리 운동, 성결운동 등 미청교도가 부흥한 양상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최근 역사학자 베빙턴(David Bebbington)이 복음주의를 회심, 성경, 십자가중심, 행동의 네 가지 키워드로 정의했고요. 현대에서는 오순절 운동의 성령운동, 공동체 중심의 재세례평화주의, 기독지성과 환경, 생태계 등의 사회참여 등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었습니다.
복음주의 운동은 근대 시기에 대중화하였고,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로 분화되어 전개됩니다. 그중 근본주의 계열에서 범보수, 정통주의를 지향하는 베빙턴이 말한 회심과 행동, 성경과 십자가 중심의 네 키워드를 꼽아 새롭게 나뉜 그룹을 ‘신복음주의’라 합니다. 미국 기독교 사회에서 분화하는 양태를 보면,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는 1942년 전후로 해서 빌리 그래함을 중심으로 등장합니다. 이후 새로운 복음주의(New-evangelical)는 60년대에 존 스토트처럼 현대 사회 문제에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강조합니다. 70년대에 이르러 젊은 복음주의(Young-evangelical)가 등장합니다. 60년대의 학생운동, 인권운동에 대해 말만하지 말고 실천하자 주장했죠. 로널드 사이더와 짐 월리스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후 존 스토트, 빌리 그래함의 리더십에 의해서 남미 급진적 제자도 그룹을 포함한 범복음주의 사회참여 수용을 주창하여 로잔언약을 만듭니다. 로잔언약은 복음주의권 안에서도 사회참여문제를 수용한다는 아주 중요한 가치로 평가 받고 있는데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로버트 웨버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차세대 복음주의(Younger-evangelical)로 이어집니다.
이 구분법을 응용해본다면, 한국 기독교는 70~80년대 활동했던 복음주의를 ‘전통적 복음주의’로, 이후 80~90년대를 ‘참여적 복음주의’로, 2000년대에 들어선 포스트모던 경향의 ‘차세대 복음주의’로 정리해봤습니다. 베빙턴의 정의를 기준으로 회심여부, QT여부, 복음주의적 서적의 판매부수 등을 근거로 숫자를 추정한다면, 전통적 복음주의를 50만 명으로, 참여적 복음주의를 5만 명으로, 차세대 복음주의는 수천 명 대로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 기독교세계관운동을 살펴보려 합니다. 기독교세계관운동은 복음주의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구축이 가능하거든요. 예를 들면 사회적 비판운동이나 학문세계를 연구한다는 것은 복음주의 정체성을 가지고 진출한 이후 일반 사회와의 맺는 관계 속에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에 대한 문제제기가 2000년대 초반에 있었잖습니까? 그 시점을 논의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볼 수 있도록 틀을 만들어 봤습니다. 80년대에는 1세대가 기독교세계관을 소개하면 2세대는 스터디를 했어요. 그리고 그 내용을 그대로 후배들에게 또 가르쳤죠. 그런데 3세대가 2002년 『복음과 상황』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왜 언제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가?’였습니다.
<표1> 기독교세계관 차세대의 문제제기
기세 차세대 | 비판 | 원인 | 대안 | 개혁주의에 대한 태도 |
양희송 대표
|
경직된 개혁주의 세계관 논의 독점
| 개혁주의 그룹의 주류 기득권 의식 | 내러티브 도입
다양성 수용 | 초교파적인 혹은, 포스트모던적인 복음주의의 협력 대상 |
김기현 목사
| 지성적, 이성적 개혁주의 특징 자체가 변혁의 장애물 | 세상과 혼합된 것이 중심문제 | 다양한 세계관 인정
구별된 교회공동체 역할 강조 | 이원록 극복하고 사회참여 일깨운 개혁주의 공헌 인정 |
정정훈 연구원
| 중산층의 이해 대변하여 생산적 결과물 없음 | 관념론적 인식론 기능 | 비기독교 세계와의 소통 | 개혁주의 세계관의 폐기 주장 |
이원석 연구원
| 이원론과 혼합주의 특징을 가진 한국 기독교의 문화 변혁 실패 | 개혁주의와 한국 유불무 혼합문화의 부조화 | 이원론과 혼합주의 현상 인정하는 ‘문화와 그리스도의 역설적 관계’ 설정 | 과거 한국교회의 탈정치화는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 입장 |
<
양희송 대표가 ‘개혁주의 세계관 논의를 독점하고 있지 않냐’고 비판합니다. 원인으로는 개혁주의 그룹에 주류 기득권의식이 있다는 것이죠.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내러티브를 도입하고 다양성을 수용할 것을 제시하죠. 여기에 대해 다른 차원으로 비판을 하는 분이 있었는데, 김기현 목사입니다. 이분은 침례교로 왜 개혁주의가 그걸 독점하는지, 개혁주의 그룹은 세상문제를 이원론으로 보는데 사실은 혼합주의가 문제라고 제시하죠. 그러니까 다양한 세계관을 인정하자고 주장합니다. 3세대에 속한 정정훈 연구원은 이를 계급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기존의 개혁주의 세계관은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요. 개혁주의 세계관은 관념론적 인식론으로 기능하고 있으니 비기독교세계와의 소통을 해야 된다 대안을 제시합니다. 심지어는 개혁주의 세계관은 폐기돼야 된다고도 했죠. 요약하면, 양희송 대표가 문제를 제기하고 김기현 목사가 침례교파의 다른 시선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원석 연구원은 이원론과 혼합주의 특징을 가진 한국기독교의 문화변혁의 실패라 비판하며 결과적으로 한국기독교의 변혁에 성공했는지 묻습니다. 개혁주의가 한국문화가 부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느냐 지적을 했고 이원론과 혼합주의 현상을 인정하는 ‘문화의 그리스도의 역설적 관계’를 설정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이에 1세대가 이렇게 반응 합니다. 송인규 교수는 기독교세계관 폐기론에는 반대하며 스스로 성찰하여 기독교세계관 운동가들의 삶의 변화가 없다 반성합니다. 이를 기독교세계관의 핵심개념의 이해 부족을 원인으로 꼽죠. 그래서 대안으로 아예 쉽게 가르치자,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2008, IVP)이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강조하며 온건하고 성경적 개혁주의의 태도를 견지하였습니다. 이보다 좀 더 강한 논조로 말한 이승구 교수는 다양한 세계관의 존재를 인정하고 내러티브보다는 명제적 진술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세계관의 관념론적 인식론 성격을 부정하고 오히려 개혁주의에 철저하지 못하여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 진단합니다. 바른 명제적 관점만이 바른 실천을 낳는다 대안을 제시하며 더 철저한 헌신을 강조합니다. 바로 이 입장이 3세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긴 어려운 지점입니다. 최태연 교수는 온건하게 조화를 이루는 태도로 접근합니다. 개혁주의의 독점적 권위주의 경향이나 실천력 부족, 내러티브 없는 수용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를 1세대와 후속세대 사이 대화 단절과 공동연구 부재로 원인을 진단합니다. 대안으로 개혁주의에 대한 역사적 특징 이해를 요청하고 명제와 내러티브 상호보완을, 각자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선의의 경쟁을 제시합니다. 양승훈 교수는 세계관의 전달방법으로서의 내러티브 필요성을 인정하고 미진한 기독교세계관 이론정립 이후 내러티브를 활용할 것을 제시합니다.
<표2> 기독교세계관 1세대 반응
기세 1세대 | 반응 | 원인 | 대안 | 개혁주의에 대한 태도 |
송인규 교수
| 기세 폐기론에 반대 | *기세운동가의 삶의 변화부재
*기세 핵심개념 (구조와 방향) 이해부족 | *기세의 성경적 근거를 중심으로 쉽게 교육,
*기세의 통전적 특징을 살려 이원론 극복 | 온건하고, 성경적 개혁주의 견지 |
이승구 교수
| *다양한 세계관의 존재 인정
*내러티브보다 명제적 진술의 중요성 강조
*기세의 관념론적 인식론적 성격 부정 | *기존 기세 작업의 추상성
*개혁주의 비철저성 | 바른 실천으로 이끄는 것은 바른 명제적 관점 | 이미 정상에 선 개혁주의 세계관에 철저한 헌신 |
최태연 교수
| *개혁주의의 독점적 권위주의 경향 인정
*변혁 위한 실천전략과 행동부족 인정
*내러티브 방법론 수용 필요성 등 인정 | 기세 일세대와 후속세대 사이 대화 단절과 공동연구 부재 | *개혁주의의 역사적 특징 이해 요청
*명제와 내러티브 상호보완
*각자의 방법론으로 선의의 경쟁제안 | 신학적으로 유연하고 혼합주의에서 벗어나는 개혁주의 필요
|
양승훈 교수 | 기세의 전달방법으로서의 내러티브 필요성 인정 | 이론 정립의 미진 | 이론 정립 후 내러티브 활용 | 건강하고 성경적인 개혁주의 견지 |
<표3> 기독교세계관 중재적 입장
중재적 입장 | 반응 | 원인 | 대안 | 개혁주의에 대한 태도 |
강영안 교수
| *기세는 교회사와 성경에서 유래하므로 개혁주의가 독점할 수는 없다
*성경의 진술은 명제가 아닌 고백으로서 내러티브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 기독교는 일반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연결점을 상실했다 |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인은 소통해야 함으로 신앙언어를 세상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이중언어 학습이 필요하다 | 개혁주의신앙을 고백한다 |
김용주 연구원
| *이원론은 아직 극복되지 않은 문제다
*기세는 역사적 산물로 우리문화에 적응실패를 기세의 내부의 결함으로 보지않는다.
*내러티브와 명제적 진술은 보완 가능하다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의 중첩적 사회문화 상황 | 기세가 열매 맺도록 아직 기다릴 필요 있다 |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분열을 염려하며 연합할 대상으로 인식 |
중재적 두 입장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김용주 연구원과 강영안 교수입니다. 강영안 교수는 기독교세계관은 교회사와 성경에서 유래하였기에 개혁주의가 독점할 수 없다 합니다. 3세대가 공감하는 지점이죠. 성경의 진술은 명제가 아닌 고백으로서 내러티브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도 합니다. 기독교는 일반세계와 소통할 연결점을 상실했기에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인은 세상과 소통할 신앙언어를 세상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이중언어학습이 필요함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김용주 연구원은 이원론이 아직 극복되지 않은 문제로 진단합니다. 현 상황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중첩되었으니 아직은 열매 맺도록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유보적 자세를 취합니다. 이른바 ‘기독교세계관 논쟁’ 이후 10년이 지났습니다.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좀 더 능동적으로 각 세대가 모여 포럼도 열고 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렇게 각자의 입장을 발표하고 끝났습니다.
오늘날은 일종의 집단 지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차세대 복음주의의 문제제기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쌍방향 소통과 논쟁이 지속적으로 있는 장이 열려야 된다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1, 2세대는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도 배우려고 하지만 지금의 3세대는 그런 관계를 힘들어 합니다. 그만큼 변화가 심해졌다는 것이죠. 지금의 기독교세계관 논쟁은 차세대 복음주의라 규정했던 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어찌보면 개혁주의 신학적 권위구조를 깨고, 포스트모던적 신학 내지는 방법론의 도래를 알린다 봅니다.
본 연구소의 이주일 연구원이 세계관동역회의 학술지 『신앙과 학문』을 가지고 기독지성운동연구 성과들이 현실적인 이슈에 응답하고 있는지 실증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표제어, 논문의 제목만을 가지고 살펴본 결과, 대부분의 논문들이 비판보다는 설명적이고, 매해 언론사들이 선정하는 10대 이슈를 중심으로 볼 때, 이슈에 대응하지 못하고, 독립적으로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반응하고 있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지금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포스트모던 시기로 이미 진입했습니다. 과거 저도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를 인본주의와 종교다원주의, 상대주의, 해체주의 등으로 평가 가능한 대상인양 다뤘습니다. 그런데 이미 도래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우리의 공기며 시대상입니다. 이미 차세대의 오장육부는 포스트모던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학습방법은 개별성입니다. 개개인의 독립된 개체가 소통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깨달아 알아갑니다. 이 소통 방법을 모른 채 한 방향으로 개혁주의의 본질은 무엇인지, 세계관의 전통은 무엇인지 선포하는 방식은 더 이상 어렵습니다. 1, 2세대끼리 함께 갈 수는 있지만 다음 세대가 따라 올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미 일반 학문세계에서 종래의 방법론은 너무 고답적이고 전통적인 느낌입니다. 이제 특별한 긴장감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등한 주체로 보고 귀 기울일 때에야 우리 안의 진정한 지적 소통이 일어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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