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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의 재발견』(박상훈 저, 후마니타스) 서평

이주일(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상임연구원/협동간사, 고려신학대학원 M.Div. 과정)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 전두환 군부 정권을 붕괴시킨 87년 6.10 항쟁 등은 한국사회를 불가역적 민주 사회로 이행시켰다. 일련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 한국 사회에는 누구도 감히 부정하기 힘든 절대 명제가 성립되었는데, ‘민주주의라는 부정할 수 없는 가치’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아무리 악한 인물이 한국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자 해도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최소한 명시적으로) 부정한다면 그 자리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조차 대통령 선거 직전에 여론을 무시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의 과오를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반성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87년 민주화 이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도 한국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아니 제대로 묻기조차 못한 과제가 있다면 최장집 교수의 책 제목처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것일 것이다. 누구의 말처럼 우리는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최소한 정치 영역에서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고, 진정한 민주화는 달성된 것이 아니라 이루어 나가야할 과제였을 뿐이다. 아무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고, 그저 전략적 야합을 통해 서로 권력을 쥐기 바빴을 뿐이다. 형식적 민주화가 성취되었음에도 대중은 아직 ‘시민’이 아니라 여전히 ‘대중’ 또는 ‘군중’에 머물러 있었고 지식인은 감추어진 이해관계를 위해 지식인의 역할을 내던졌으며 민주화 세력은 새롭게 이합집산하여 각자의 권력과 힘의 추구로 나아갔다. 한국은 민주화된 사회였으나 아직 민주주의 사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의 진보 또는 개혁 정권을 경험한 한국사회는 야당이 집권해도 소위 ‘별다를 게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진보의 무능 또는 배신(?) 앞에서 차라리 ‘먹고 살게 해 달라’, ‘그때가 그립다’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일종의 (심정적) 진보 진영조차 일련의 좌절과 실패, 무능과 폭력을 대면하면서 더 이상 어떤 희망이 있을까라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박상훈 박사의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 일련의 시도에서 처절한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책이다. 그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촛불집회나 안철수 현상, 정치에 대한 회의와 혐오 등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라는 문제가 왜 풀리지 않고 좌절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아주 근본적으로” 묻고 답한다. 박근혜 정부를 ‘독재 정권’, 이명박 정부를 ‘부패 정부’라고 명명하고 촛불집회를 비롯한 시민의 직접적 투쟁과 궐기, 선거에서의 진보 진영 결집과 투쟁 등으로 한국 정치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했다가 절망을 경험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따져묻는다. 그리고 “아주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도전한다.


나에게 이 책은 곧 하나의 새로운 충격이었다. 나도 모르게 진보 진영에서 공유하던 정치에 대한 이해와 접근방식이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근본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그토록 일상적으로 내뱉었던 정치에 대한 근본적 혐오와 회의가 한국 정치의 극우보수적 구도를 어떻게 강화시키고 있었는지,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에 사로잡혀 현대의 의회민주주의, 정당 민주주의를 불신하던 사고와 전략이 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는지 등에 대해 이 책은 답하고 근원적인 사고의 전환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이 책으로 한국 정치를 읽어내는 새로운 눈을 얻은 것은 물론이다. 역시 조급하고 성급한 행동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닥치고’ 앉아서 공부할 일이다. 무지는 좌절을 낳을 뿐이다.


한국 정치에 대한 진보/개혁적 열정 속에서 급진적이고 직접적인 방법과 분위기 속에서 절망과 회의를 경험하고 막다른 길에 내몰렸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감히 추천한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하나씩 쌓아가기 적당한 시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