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만든 사회적 상상들
찰스 테일러, 2010, 『근대의 사회적 상상』, 이상길 옮김, 서울: 이음.
‘근대성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는 매우 거대하면서도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다.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과학, 기술, 산업화, 도시화 등과 같은 제도적 형식, 개인주의, 세속화, 도구적 합리성 등과 같은 새로운 생활양식, 소외, 무의미, 절박한 사회적 해체감 등 실존적 차원이 복잡하고 우연적으로 뒤얽혀 형성된 것이 바로 근대성이다. 그렇기에 근대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포괄적이면서도 정확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세계적인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이 어려운 일을 탁월하게 해내고 있다. 그의 책 『근대의 사회적 상상』(Modern Social Imaginaries)은 한글 번역본 기준으로 약 300쪽이라는 얇은 분량만으로 근대성을 포괄적이고 정확하게 그려낸다. 근대성을 짧은 시간에 (‘사회적 상상’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 만큼 좋은 책도 드물다.
먼저, 찰스 테일러는 근대성의 출발을 주술화된 세계로부터 개인들이 이탈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개인들은 본질적으로 전체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했다. 종교적 차원에서 개인들은 단지 하나의 사회로서만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자신의 세속적인 복을 획득하려면 자신이 속한 집단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전체 집단이 전제하고 있는 신성한 질서를 자명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것과 연결된다. 하지만 근대성은 이처럼 주술화된 세계로부터 개인들이 이탈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거대한 이탈’에는 테일러가 말하는 차축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기여가 결정적이다.
근대성은 사람들에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회적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 상상이란 이론 이전의 것이며, 사람들의 공통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공통의 이해(이미지)를 가리킨다. 테일러에 따르면, 근대성은 사람들에게 경제, 공론장, 인민 주권이라는 세 가지 사회적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경제는 군주의 통치 범위 밖에서 일종의 인과 관계의 장을 형성하여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다. 인간은 정치나 군사가 아닌 경제의 장 안에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서비스를 교환하고 공동의 선을 증진한다.
공론장은 공론을 형성하는 공간으로서 18세기 서유럽에서 새롭게 출현했다. 한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면대면으로 서로 만난적이 없으면서도,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일종의 공동의 토론 공간 속으로 연결된다. 이를 통해 정치의 장 바깥에서 공론장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공론을 만들어 간다. 이는 정치가 반드시 고려하거나 따라야 할 일종의 권위 있는 성찰적 담론을 제공한다.
영국과 미국 등을 중심으로 인민의 폭넓은 참정권에 대한 요구가 강화된다. 러시아 혁명에는 전제정부로부터 인민이 주권을 양도받는다는 개념이 빠져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근대성은 18세기의 위대한 혁명들을 거치면서 인민 주권이라는 새로운 상상을 구성해 냈다. 이는 인권이라는 이성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규범적 개념과 연결되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찰스 테일러의 책을 아주 간단하고 거칠게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근대성을 관념과 실천이 복잡하고 상호적으로 뒤얽힌 ‘사회적 상상’의 차원을 중심으로, 경제, 공론장, 인민 주권과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그려낸 것은 테일러의 탁월한 솜씨다. 물론, 이것이 근대성의 전모는 아니지만, 그 중심을 꿰뚫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철학자들만이 이해할 법한 난해한 서술이 아닌, 누구나 읽어볼 만한 평이한 언어로 설명하는 친절함도 테일러를 추천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주일 / 복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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