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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까레이스키를 생각하다

category 카테고리 없음 2019. 2. 28. 08:49

* 이번 튜터 칼럼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최근 연해주 지역을 방문한 박은영 연구원의 까레이스키에 관한 글을 싣습니다. 식민지의 현실을 피해, 혹은 제국의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이들의 여정을 통해, 권력에 의해 고통받고 억압당했던 이들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최근 다녀온 러시아 기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곳 중 하나는 고려인 문화센터였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바로 그곳에서 나라를 잃고 타지에서 나그네가 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세월을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는 억압과 가난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한 이래 오랜 세월 동안 나그네로 살았던 ‘까레이스키’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본다. 1800년대 중반 이후 대기근 등으로 인해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조선 농민들이 몇 차례에 걸쳐 연해주로 이주했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러시아 땅으로 건너가는 사람들도 생기면서, 1930년대에는 수십만 명의 한인들이 연해주 땅에 정착해 살아가게 되었다.

조선이 식민지화된 이후 연해주에는 신한촌을 중심으로 11개의 한인 학교와 한인 언론들이 만들어졌다. 국권강탈 직후 연해주의 한인들은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블라디보스토크 각 영사관에 보내고, 3.1운동 이후에는 제일 먼저 임시정부를 세우는 등 식민지 초기부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7년 러시아에서 약소민족 해방을 약속하는 볼셰비키들이 혁명을 일으킨 이후에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조직한 유격대도 이를 저지하는 러시아 백군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군 등과 싸웠다. 

고려인들은 볼셰비키들과 함께 연해주를 침략한 일본군과 싸웠지만, 일본군이 물러나고 소비에트의 권력이 안정되자 소련 정부는 고려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소련 정부는 먼저 고려인 사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던 2,500여 명을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무엇보다 1937년에는 극동 지역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그 해 9월부터 12월까지 고려인 18만 명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강제이주열차에 올랐다. 그들은 무려 40일 동안 가축운반용 기차에 실려 연해주에서 8,000Km 이상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옮겨졌다. 이주 시기는 추운 겨울이었으므로 40일 간의 여로에서만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40여 일만에 고려인들이 열차에서 내린 곳은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반(半)사막지대였다. 고려인들은 소련으로부터도 적성민족 취급을 받고 소련 휘하에 있던 우즈베키스탄공화국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고려인들은 살 집도 제대로 얻지 못했으나, 땅을 구해 벼농사를 시작했다. 고려인들에게는 우수한 벼농사 기술이 있었고, 다행히 이주한 해와 그 다음 해에 풍년을 맞아 정착에 성공할 수 있었다.

농업기술 덕택에 중앙아시아 정착에 성공했지만,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에 민족주의와 내전이 일어나면서 다시 시련을 맞았다. 사회주의로 억압되어있던 민족주의가 분출하면서, 소수민족이었던 고려인들은 다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결국 1만여 명의 중앙아시아지역 고려인들은 다시 난민이 되었고, 그 중 수천 명이 다시 연해주로 재이주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연초부터 각종 미디어에서는 3.1운동 특집을 마련하는가 하면, 역사 연구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느라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다음주 3.1절 당일에는 거리 곳곳에서 성대한 행사가 치러질 것이다. 이 시끌벅적한 시기에 머나먼 땅에서 격랑의 세월을 보내고 또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까레이스키를 기억해본다. 가난과 억압을 피해 자유와 독립을 위해 먼 길을 떠났던 사람들. 그들이 보낸 격랑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묵묵히 씨를 뿌리고 삶을 살아낸 얼굴들을 떠올리며 2019년 3월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