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학, 『요한계시록:약자를 위한 예배와 저항의 책』, 새물결플러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상징과 묵시들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평신도에게는 때로 저질러서는 안 될 금기처럼 여겨졌다. 교회 역시 그러한 상징들과 묵시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대체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에게 요한계시록의 끔찍한 종말론적 재앙의 이미지들은 막연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14만4천 명 구원론이나 베리칩과 같은, 어려운 상징들에 대한 비교적 명쾌한 이와 같은 ‘잘못된’ 해석들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잠재우는 아편처럼 기능하기도 했다.
『요한계시록:약자를 위한 예배와 저항의 책』은 이와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잘못된 이해를 넘어선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대한 예언의 차원이 아닌 현재적 차원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사회적 맥락에 주목한다.
요한계시록 저술 당시의 로마는 거대한 신전이었다. 황제는 ‘팍스 로마나’를 구축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 구원자이자 신으로서 숭배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쌓아올린 평화는 억압과 착취, 폭력 위에 구축된 것이었다. 다른 체제에 대한 상상은 용납되지 않았고, 따라서 황제가 아닌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그가 다스리는 나라를 고대하는 기독교 공동체는 마땅히 배제되어야 할 이들로 여겨졌다.
저자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요한계시록의 맥락을 짚어 나간다. 저자는 다니엘서나 에녹의 서신과 같은 유대 묵시문학의 전통으로부터 시작해, 요한계시록의 언어들을 억압받는 자들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저자에 의하면 묵시문학으로서의 요한계시록은 억압과 핍박 속에 있던 기독교 공동체에게 공유된 것으로서, 억압과 핍박의 제국을 압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가능성들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요한계시록이 교회로 하여금 불의와 압제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할 것을 촉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결국 마침내 임할 ‘새 예루살렘’은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임과 동시에 불의의 시대에 교회가 함께 선취해야 할 대상으로서 그려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배는 불의의 체제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황제 숭배라는 거짓된 예배가 만연한 사회에서 교회가 함께 드릴 예배는 ‘하늘의 예배’다. 이는 폭력에 굴복하거나 권력과 유착해 드리는 황제 숭배의 의식과는 대비되는, 오직 구원자 되신 어린양만을 찬양하는 참된 예배다. 그리고 이 저항을 촉구받는 것은 어떤 한 개인이 아닌, 함께 고통 받고 압제받는 공동체, 교회이다.
이 책은 주석이다. 그런고로 주석답게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세심하게 해설하면서 요한계시록의 맥락을 짚어 나가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메시지’를 중간중간 끼워넣음으로써 요한계시록의 문제의식을 현재의 시점에서 전유한다. 따라서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제기된 저항에의 촉구는 고스란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우리 역시 물신 숭배와 미디어 권력에 맞서 약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과 함께 싸워 ‘새 예루살렘’을 이루어야 할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빌론이여’라는 준엄한 선언은 로마제국의 붕괴로 성취된 것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무너져야 할 바빌론은 존재한다. 물신과 미디어, 정치권력이라는 바빌론은 지금도 그 폭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요한계시록을 시대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 관점으로 읽는다는 것은,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신앙들 속에서 저항의 동력을 잃은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와 하나님나라의 의미를 재사유하게 할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